1940년 2월 7일

 

   
 

한해지 수업료 감면, 학습장 등 제공
간이학교 1학년 편지, 식민교육 폐해

“한해지의 어린 아동들은 춘궁기를 앞두고 생활에 곤란을 받으면서 이 곤경을 뚫고 나갈 굳은 결의를 가지고 있는데, 칠일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도두간이학교(平澤郡 彭城面 棹頭簡易學校) 일년급 아동 방흥봉(方興鳳) 군으로부터 남총독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어 한해지 아동의 심경을 말하고 있다(하략)”(조선일보, 1940년 2월 8일)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전시체제기에 무엇보다도 ‘민족말살’이 중요했다. 일본어를 사용하고 일본정신을 갖도록 강요했다. 그러다보니 많은 식민지 학생, 청년들이 일본인화 되기도 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식민지교육이 얼마나 철저히 추진됐는지 상상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불행하게도 평택에서도 보이고 있다.

1940년 겨울은 한해가 심했다. 특히 평택과 안성이 극심했기 때문에 미나미南 총독이 시찰을 할 정도였다. 미나미 총독은 2월 7일 경성역에서 출발, 평택과 안성의 한해지역을 살펴보고 당일 귀경했다.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을 돌아다녔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팽성읍 도두리는 들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도두간이학교의 한 학생이 미나미南 총독에게 감사의 편지를 전달했다. 편지의 내용인즉 다음과 같다

(전략) 먹을 것과 돈이 없어서 곤란한데 나라에서는 우리들을 위하여 수업료를 면제해줄 뿐 아니라 점심·학습장·연필 같은 것도 주어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총독 각하의 감사한 은혜를 생각하고 이로부터 일층 힘써 공부하여 천황 폐하께 충성을 다하려고 생각합니다.(하략)

당시 학생의 입장에서는 수업료를 면제해주고 학습 자료를 주는 것에 고마워하고 있지만, 그 결론은 식민정책을 충실히 받아들이고 일본을 위해 충성을 다한다는 각오다. 일제의 식민지 교육 목표를 ‘천황에게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충량한 신민’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일제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타율성성론他律性論, 정체성론停滯性論, 당파성론黨派性論의 식민사관을 확립시켰다. 이와 같은 식민교육과 식민사관에 의해 많은 학생과 청년 나아가 많은 조선인들이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식민지 시기는 그야말로 암울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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