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저항은
폭력·불법이라며 외면하고,
정권에 위협이 되지 않는 집회는
권장하고 지켜야 할 권리로 만드는
그들의 태도에 의문을 갖다

 

   
▲ 김벼리
현화고등학교 3학년

이번 주 주말이면 ‘제5차 촛불집회’가 열린다. 회를 거듭할수록 시위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수는 늘어가지만 그럴수록 더욱 평화롭고, 더욱 질서정연한 시위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에 언론사들은 물론, 경찰까지 합세하여 광화문에서의 ‘평화’ 시위를 성숙한 시위문화라며 대대적으로 칭찬했다.

물론, 평화적 시위는 중요하다. 조직과 단체만이 아닌 어린이·노인·신체적 약자 할 것 없이 더 많은 시민들을 광장으로 모이게 하기 때문이다. 이번 시위에 학생들과 가족단위 시위참가자들이 많았던 이유도 이러한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차벽 위에 올라간 시위자를 향해 “폭력시위 안 돼!” “평화시위 해야 돼!” “내려와!” 등의 구호를 외치며 그들을 문제시 여기는 것과, 차벽에 붙인 꽃 스티커를 시위자들이 자발적으로 다시 떼버리는 것 등을 보며 무조건 착하고 바른 시위여야 한다는 것은 우리 의식 속의 또 다른 ‘강박관념’이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도 느껴진다.

시위 자체가 공권력에 대한 저항이다. 여기서는 옳은 저항이냐, 아니냐가 문제이지 얼마나 질서 있고, 얼마나 깨끗한지가 우선순위가 될 수 없다. 물론 비폭력과 평화의 의의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폭력과 평화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부터가 흑백논리이며 평화시위, 불법시위의 틀에 우리 스스로 갇히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집회는 안전하고 즐거운 축제 같은 분위기라서 좋다. 그러나 평화집회가 아니라고 시위자들을 ‘폭도’ ‘프락치’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세계인권 선언’ ‘자유권 규약’ ‘미주인권 협약’ ‘유럽인권 선언’ 등 어디에서도 적법하고 평화로운 집회와 시위를 보장한다고 되어있지 않지만 ‘peaceful’은 보장한다고 한다. 즉, 평화로운 시위는 불법이어도 보장하란 것이다. 여기서 평화적인 것에 대해 유럽 재판소의 해석을 보면 우리 생각과는 다르게 ‘성가시게 하거나, 짜증나게 하거나, 불편을 끼치거나, 일시적으로 업무를 방해하는 것’도 모두 평화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평화시위의 틀을 벗어던지고 폭력시위를 하자는 말이 아니다. 기득권 정치세력들과 언론은 손에 촛불을 쥐고 위협적이지 않은 정도에서의 시위만을 성숙하고 모범적이라고 규정지었다. 언론은 지금까지 노동자들의 투쟁을 외면했으며 그들이 왜 그렇게 강력한 저항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우리의 시위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언론이, 얼마 전 고故 백남기 농민을 전문 시위 꾼으로 몰아갔던 바로 그 당사자들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이들이 만들어내는 ‘착한 시위’의 틀은 불편하다. 강한 저항은 폭력이고 불법이라며 외면하고, 얌전하고 정권에 위협이 되지 않는 집회는 권장하고 지켜줘야 할 권리로 만들어버리는 그들의 태도에 의문을 가진다. 국민을 우롱하고 심지어 국가를 대상으로 소꿉놀이를 한 대통령에 대한 단죄가 단지 촛불콘서트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네 차례의 평화적인 집회결과는 어떠한가? 야당에서는 국민들의 뜻을 엄중히 받아들이겠다는 말뿐이고, 박근혜 대통령은 3주 연속 5% 지지를 받으면서도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다.

평화적인 집회로도 목적달성이 될 수 있다면 비폭력이 해답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 ‘3·1운동’ ‘4·19혁명’ ‘5·18민주항쟁’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처럼 물리력이 동원된다면 비폭력일지라도 정의로운 것이며 역사 발전 법칙에도 맞는 것이다. 적정선을 지킬 줄 아는 것이 품위가 아니다. 시민들이 그들이 모인 목적을 궁극적으로 해결해낼 수 있어야 진정 품위 있고 성숙한 시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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