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탐방 석장리선사유적지(충남 공주)


석장리 선사유적지에서
구석기시대 역사를 배운다


평택YMCA 어린이역사기행단이 3월부터 11월까지 평택을 비롯해 서울, 경기, 충남, 충북지역 등에 있는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며 어린이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우리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함양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평택시사신문>은 평택 어린이들에게 역사의 의미를 알리는 현장을 연재함으로써 그 의미와 함께 하고자 한다. 어린이역사기행단은 현재 11기 20명을 추가 모집 중이며, 자세한 사항은 평택YMCA 청소년교육부(681-3081, 656-9280)로 문의하면 안내받을 수 있다.
- 편집자 주 -




 

 

 

 

■ 충남 공주 유적지 탐방-석장리 선사유적지
- 양재준/경기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우리나라는 단군 할아버지가 처음 나라를 세운지 대략 5000년이 되었다고 하지요. 그럼 단군께서 고조선을 세우기 전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까요?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70만 년 전이라고 해요. 굉장히 오래 되었지요? 하지만 아쉽게도 고조선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글자가 없어서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았어요. 이렇게 아무런 기록도 없는 시기를 ‘선사시대’라 해요. 역사기록 이전의 시대라는 뜻이에요. 글자가 생기고 역사기록이 있는 시기는 ‘역사시대’라 불러요.
선사시대는 사람들이 사용했던 도구에 따라 순서대로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로 나누어요. 그중에서도 오늘은 구석기 시대에 대해 알아볼 거예요. 구석기 시대에는 ‘뗀석기’를 주요도구로 사용했어요. 뗀석기란 돌을 떼어내거나 깨뜨려서 만든 도구에요.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뗀석기로는 ‘주먹도끼’ ‘긁개’ ‘자르개’ ‘밀개’ 등이 있어요. 이 시기 사람들은 아직 농사를 지을 줄 몰랐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5~10명이 모여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했어요. 그래서 막집을 짓거나 동굴이나 바위 그늘 등에서 잠시 머무르다 다시 이동을 했어요.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합했던 시기에는 우리나라에 구석기 시대가 없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어요. 일본은 우리나라가 자기들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거예요. 이러한 생각은 1964년 충청남도 공주 석장리에서 구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되면서 바뀌게 되었어요. 석장리 유적을 처음 발견한 것은 미국 대학원 학생이었던 Albert Mohr와 그의 아내 L.L.Sample 이었어요. 이들은 발견한 유물을 연세대학교의 손보기 교수님께 가져갔어요. 손보기 교수님과 그의 동료들은 30여 년에 걸쳐 석장리 유적을 발굴하고 조사했어요.
석장리 구석기 유적지는 우리나라에 구석기 시대가 있었음을 처음으로 알게 해 준 중요한 유적이에요. 여기서 발견된 유물들을 토대로 1974년에는 국사교과서에도 구석기시대에 관한 내용이 실리게 되었어요.

 

 


 

■ 우리나라 최초의 구석기 시대 유적지
- 정민서/역사기행단 11기(용이초등학교 5학년)

드디어 충남 공주로 떠나는 2번째 역사캠프다. 처음으로 평택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가는 거라 설렜다.
우리는 먼저 공주 석장리 박물관에 들러 구석기 시대를 토대로 만든 스탬프를 나무목걸이에 찍고 색칠했다. 그리고 곧 열리게 될 석장리세계구석기축제 덕분에 여러 유물이 나왔던 유적지 위에서 밥도 먹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뗀석기와 간석기의 차이점을 잘 몰랐다. 그런데 알고 보니 뗀석기는 깨뜨려서 만든 도구이고 간석기는 신석기시대에 갈아서 만든 도구였다. 이외에도 긁개, 찍개, 밀개 등 여러 가지 도구들이 발견되었다. 석장리 유적지는 Albert Mohr 부부가 처음 발견한 후 손보기 교수님께 알려서 우리나라에도 구석기 시대가 있었음을 증명해주었다고 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나라 역사가 일본보다 오래 되지 않았다는 일본의 주장 때문이다.
석장리 유적지에서 처음 발견된 유물이 뗀석기이고 그중에서도 대표 유물은 주먹도끼다. 여러 사람들은 주먹도끼를 만능 도구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 만큼 여러 용도로 쓸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구석기시대에도 불을 사용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 용도는 추위로부터 피하고 동물을 사냥하려는 목적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글자가 없었더라도 충분히 자신의 느낌을 표현할 수 있었던 시대, 그만큼 배울 것도 많아 더욱 유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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