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3월 7일

연혁·폐고읍·군세 등 평택 역사 소개
인구 6만 4000여 명, 일본인 729명


 

 

 

“(가) 沿革: 本郡은 高句麗 時에 釜山縣이라 稱하고, 新羅 景德王 時에 振威라 稱하여 水城郡(水原郡)의 領縣이었으며, 高麗朝를 經하여 李朝 太祖 時에 忠淸道로부터 割하여 本道에 移屬케 한 後 振威郡이 되고 大正 三年 郡廢合 時에 忠淸南道 平澤邑 外 水原郡 龍仁郡 陽城郡의 一部가 本郡에 編入되었다. (나) 廢古邑: 古에 河八縣이라 稱하더니(중략) (다) 郡勢: 本郡은 本道 南部에 在하니(하략)”(매일신보, 1921년 3월 7일자)

평택과 관련된 역사기록은 다양하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옛 기록이 있는가 하면, <평택시사>처럼 최근의 기록도 있다. 이외에도 일제강점기 평택에 대한 기록도 많지는 않지만 몇몇 기록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동아일보>의 ‘순회탐방 진위(평택)’와 <매일신보>의 ‘근역지’이다. 이중 <동아일보>의 내용은 본지를 통해 소개한 바 있다. 이번에는 <매일신보>를 통해 당시의 평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근역지’는 <매일신보>에서 연재한 코너로 필자는 백금생(白錦生)이다. 백금생이 어떤 인물인지는 아직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61번째로 연재된 평택 ‘근역지’의 내용은 (가)연혁, (나)폐고읍, (다)군세로 구성돼 있다. 연혁과 폐고읍은 일반적인 역사의 기록으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렇지만 1921년 평택군의 군세는 어떠했을까?

군의 동북 일대는 산능(山陵)으로 이뤄졌으며, 진위천이 군의 서부를 휘감고 있고, 경부선 철도가 군의 중앙을 지나가고 있다. 진위천변에는 3리 정도의 평야가 형성됐는데 ‘평택평야’와 인접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진위천은 조수(潮水) 시에는 작은 배(小舟)를 이용해 건넜다. 경지면적은 20,575정5단, 대(垈) 면적은 즉 생활공간은 543정4단, 산림면적은 29,888정9단이었다. 인구를 보면 총 호수는 1만 1336호, 6만 3647명으로 남자는 3만 3098명, 여자는 3만 549명이었다. 조선인은 1만 1090호, 6만 2851명으로 남자는 3만 1633명, 여자는 3만 218명이었다. 일본인 호수는 203호, 729명으로 남자는 400명, 여자는 329명이었다. 중국인 등 외국인은 20호 67명이었으며, 이중 남자는 65명, 여자는 2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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