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7월 19일

김광원 목사 파면, 수개월 간 갈등
교인의 90%가 김광원 목사 지지

 

 

 

“성결(聖潔)하여야 할 교회(敎會) 내부에 폭풍우가 전조선적으로 확대되어 교회간, 부대 一반 신도간의 대립 항쟁이 날을 따라 격성되며 그 내부적 암투가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는 이때, 또 다시 평택성결교회(平澤聖潔敎會)에서는 十여 년 동안 그 밑에서 통제를 받아오던 동양선교회(東洋宣敎會) 본부에 대하여 지난 十九일에 신도 송회를 열고 본부 간부들의 타락성을 지적하는 장문의 선언서를 발표하는 동시에 탈퇴의 선언을 하고 신교회(新敎會)를 조직코자 활동을 개시하였다 한다.”(『조선중앙일보』 1936년 7월 25일)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결교회는 기독교의 한 교단으로 ‘대한기독교성결교회’를 일컫는다. 한국에서 성결교회의 모체는 미국의 카우맨(Cowman,C.E.) 부부와 킬버른(Kilbourne,E.A.)에 의해 극동지방 선교를 목적으로 1901년에 설립된 동양선교회(東洋宣敎會, 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다. 한국 성결교회는 일본 동경에서 동양선교회 소속 성서학원을 졸업한 정빈(鄭彬)과 김상준(金相濬)이 1907년에 귀국하여 서울 종로에 복음전도관을 세움으로써 시작됐다. 이 두 사람이 전도활동을 시작한 지 3년 뒤인 1910년에 두 사람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동양선교회는 영국인 토마스(Thomas,J.)를 초대 감독으로 한국에 파송함으로써 독자적인 선교활동이 시작됐다.

평택에 성결교회가 뿌리내리게 된 것은 1921년경이었다. 『동아일보』(1927년 4월 23일)에 의하면, 전도사 한 명이 파견돼 3년 동안 선교한 결과 1924년 12간의 기와집을 매입해 예배당을 신설하고,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당시 신문기사에는 ‘동양선교회’로 돼있다. 1927년 현재 교인수는 80여 명이고, 전도사는 김협두(金俠斗)였다. 그런데 『동아일보』 1923년 7월 19일자에 의하면, 7월 15일 평택역 앞에 교회당을 준공하고 헌당식을 했다고 한 바 있다. 헌당식은 김협두 전도사의 사회와 선교사 브릭스의 설교로 진행됐다. 두 기사는 평택성결교회의 설립과 관련된 것으로 볼 때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1923년 7월 15일 헌당식을 한 것은 확실하다고 판단된다.

평택성결교회는 1936년에 이르러 150여 명의 교인과 주일학교 학생 100여 명이 될 정도로 성장했다. 그렇지만 교당 신축 이후 본부와 갈등이 발생했다. 갈등의 원인은 본부에서 목사 김광원을 파면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평택성결교회는 수습을 위해 노력했지만, 1936년 7월 19일 신도회를 열고 동양선교회로부터 탈퇴하기로 결의했다. 이와 같은 결정에 대해 평택지역 사회에서는 “앞으로 두 교회의 장래를 주시한다”고 할 정도로 관심을 가지고 원만히 해결되기를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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