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0월 10일

사랑 없는 남편, 시부모 학대 가출
겨우 찾은 아내 죽어도 집에 안가

 

 

“진위군 고덕면 해창리(振威郡 古德面 海倉里) 구십번지 김정철(金貞哲, 18)의 처 김성녀(金姓女)라는 열아홉 살 먹은 여자는 시가에서 시부모의 학대와 어린 남편의 사랑 없는 살림에 견디지 못하여 지난 사월 이십일에 홀로 표연히 짐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시내 관철동(貫鐵洞) 이백사십사번지 김민자(金民子)의 집에 고용으로 있는 것을 그의 남편이 이번 박람회에 올라와서 수소문을 한 결과 전기 처소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십일에 찾아가서 집으로 가자고 하였으나 김성녀는 죽으면 죽어도 못가겠다고 하므로 종로서에 호소를 하였는데, 그 여자에게는 벌써 그 동안에 정부(情夫)가 생긴 모양이라더라”(『중외일보』 1929년 10월 12일)

결혼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 한다. 이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는 일 중 가장 큰 일’이라는 의미다. 더군다나 결혼은 경사스러운 일로 잔치 중의 잔치이다. 그렇지만 막상 결혼이 경사스러운 일만은 아닌 경우가 많다. 행복한 결혼도 있지만 불행한 결혼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대부분 결혼을 하면 독립적인 생활을 하지만, 1920년대만 해도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렇다보니 고부간의 갈등도 적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내보다 나이가 어린 남편도 많았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린 남편과 시부모와 함께 산다는 것은 삶의 행복이 아니라 불행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평택에서 바로 이 같은 불행한 결혼생활이 있었다.

고덕면 해창리 김정철은 18세에 한 살 더 많은 김성녀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시부모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 김성녀는 무엇보다도 시부모의 학대가 견디기 힘들었다. 한 살 어린 남편의 사랑 없는 결혼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1929년 4월 20일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나왔다. 그 길로 서울로 올라갔다. 관철동에 사는 김민자라는 여자의 집에 고용인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아내가 가출 후 서울로 갔다는 소문을 들은 남편은 때마침 박람회 구경을 왔다가 수소문한 끝에 아내의 거처를 확인하였다. 아내를 찾아가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지만, 아내는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집으로 가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남편은 경찰서까지 찾아가 호소하였지만 아내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기자는 아내가 집으로 가지 않은 이유는 다름 아닌 정부(情夫)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했다. 시대의 굴레에 묶이지 않고 당당했던 김성녀의 삶에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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