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5월 19일

아내 친정 행, 다른 여자와 혼인
고부 갈등에 남편·시아버지 공모

 

“시내 황금정(黃金町) 이정목 36번지 윤아지(尹阿只, 二三)는 소화 이년 십일월 스무살 때에 진위군 병남면 통복리(振威郡 丙南面 通伏里) 이백 칠십 육번지 박기선(朴冀璇)에게로 시집을 갔던 바, 시집을 가던 길로 고부(姑婦) 간에 화목하지 못하고 있던 중 그 이듬해 삼월경에 박기선의 실부(實父)되는 박상오(朴相五)와 그 조부되는 박치원(朴致遠)은 그 며느리 되는 윤아지에게 아직 혼인계(婚姻屈)를 하지 않았으니, 그의 친정되는 서울로 올라가 친정아버지의 실인(實印)을 받아오라고 꼬여 보내고 윤아지가 친정에 가고 없는 동안에 박기선은 이전부터 약속해 두었던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민적에까지 올려버렸으므로, 윤아지는 전기 사실이 전부 박기선 부자의 공모로 속은 줄 알고 친정 올 때에 배었던 아이까지 낳았으나 가난한 살림에 도저히 생활할 길이 없음으로 할 수 없이 지난 십구일 그 남편 박기선 외 가족 두 명을 상대로 이천오백원의 위자료(慰藉料) 청구소송을 제기하였더라.”(『중외일보』 1930년 5월 21일)

위자료 청구와 관련 ‘민법’에 의하면, “타인의 신체적 자유 또는 명예를 해하거나 기타 정신상 고통을 가한 자는 재산 이외의 손해에 대하여도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정신상의 고통에 대해서도 위자료라는 명목으로 손해를 배상하라는 취지이다. 이에 따라 다양한 위자료 청구소송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1930년 남편과 시아버지를 대상으로 위자료를 청구한 소송이 전개된 바 있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살던 윤아지라는 여성은 20세 때인 1927년 12월, 평택 통복동에 사는 박기선과 결혼했다. 첫날부터 고부간의 갈등이 시작돼 신혼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 신혼 4개월이 지난 1928년 3월경, 시아버지와 시증조부가 며느리 윤아지에게 아직 혼인신고서를 제출하지 않았으니, 친정아버지의 도장을 받아오라고 돌려보냈다. 이를 순수하게 믿은 윤아지가 집으로 간 사이 음모가 이뤄졌다. 다름 아닌 남편 박기선이 전부터 결혼을 약속하였던 다른 여자와 혼인신고를 하고 호적에까지 올려버린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아이까지 낳아서 기르던 윤아지는 뒤늦게 이를 알게 되었다. 억울한 윤아지는 더욱이 아이까지 길러야 하는 상황에서 경제적인 여유도 없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남편의 소행이 시아버지, 시증조부가 서로 공모해서 한 것으로 판단한 윤아지는 이 셋을 상대로 2500원의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결과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당시에도 일상에서 위자료 청구소송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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