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도 하나의
작은 사회이기 때문에
학교가 살아야
사회가 사는 것이다

 

   
▲ 공일영 소장
청소년역사문화연구소

공자는 자로와의 대화에서 정치를 논하며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부모는 부모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君君 臣臣 父父 子子”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명이 이뤄지지 않는 사회는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회가 될 것이며, 부조화로 인한 덕德의 부재와 사회의 불안정이 만연해질 것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에서 현상을 바라보고 분석하며 적용하려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고민하기보다는 내 기준으로 판단해 단정 짓고 결정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학교를 바라보는 시각은 본인의 학교 생활, 자녀에 대한 교육 경험 등을 통해 모두가 전문가인 듯 행세하며 수많은 분란과 논쟁의 중심에 학교를 두는 경향이 크다.

학교는 동네북이 아니다. 사회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원인, 해결 방법과 책임을 학교로 돌리는 것은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이다.

최근 매스컴을 메인으로 장식하는 이슈가 유치원 회계부정 사건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정부지원금이나 보육료의 사용 실태가 어처구니 없게 엉뚱한 곳으로 사용돼오던 사실이 표면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반성과 회복의 노력은 온데간데없고 온갖 변명으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이익집단화 돼버린 대표 단체의 행동은 지성인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안타까운 일이다. 그동안 외쳐오던 병설유치원의 증설이 더욱 탄력 받고 정부는 소매를 걷어 올린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도 학교현장 패싱이 나타나는 실정이다.

수능은 대학교 입학생을 선발하는 시험이다. 수능 시험장으로 선정된 학교는 학교의 기본 업무 이외에 추가 업무가 생기는 것이고, 시험 감독 선발에 또한 애를 먹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게 긴장하는 시험의 연속에 발걸음마저 불편하다. 시험이 끝난 이후의 온갖 민원의 대상이 돼 다시 한 번 시달리게 된다.

일선 고등학교가 대학의 업무를 대행해주는 꼴이다. 고입 선발고사가 있던 시절에도 시험에 관련된 일은 고등학교에서 진행했다. 본인이 지원한 학교가 시험장이 돼 예비소집을 하고 시험을 본 후 당락이 결정됐다. 왜 작금의 대학은 수능을 남의 일 보는 듯 하고 있는가? 수능문제 출제에는 대학 교수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대학에서 필요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한 시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험에 관련한 일련의 진행 상황들을 대학에서 주도적으로 진행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왜, 대학은 고상한 척 뒤로 한 발 물러서있고, 고등학교가 그것을 주관해야하는가?

교육 활동에서 진학이 중요한 부분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교육 관계자들의 정명正名을 생각해봐야 한다. 보육과 교육의 다름을 이해하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필요한 필수 학습 요소와 기본 소양을 기르며, 사회적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고 찾아가는 곳이 중등학교다.

의사가 아닌 의료기기 판매상이나 간호사들이 대신 시술을 진행하는 사건이 우리를 놀라게 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들이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인술을 버리고 자신의 직을 망각하고 자본의 노예가 돼가는 씁쓸함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때 사회가 안정되고 바르게 돌아가는 것이다. 생산자는 생산을, 소비자는 소비를, 판매자는 판매를 담당하고 교육기관은 교육을 정치인은 바른 정치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수많은 규제와 제약으로 학교의 힘을 빼놓고 온갖 사회 문제의 원인과 책임을 학교로 돌려 비난하고 돌을 던지는 것은 옳지 않다. 함께 가는 사회여야 한다. 학교가 병들고 있다. 학교도 하나의 작은 사회이기 때문에 학교가 살아야 사회가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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