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2월 9일

손자와 친권자 상대 소송
매월 20원씩 지급 요청해

 

 

“수원군 정남면 금복리(水原郡 正南面 錦福里) 김성관(金聖寬)의 집에 류하는 최병록(崔炳祿)이란 사십육세 된 노인은 진위군 고덕면 두릉리(振威郡 高德面 杜陵里) 민적상으로는 김광덕(金廣德)이요 통칭 김홍식(金弘植)이란 십구세의 미성년자와 그 미성년자의 친권자되는 임용식(林容植, 39) 두 명을 상대로 부양료(扶養料) 사천 팔백 원 청구 소송을 작 구일에 경성지방법원에 제기하였더라. (중략) 또 피고는 오늘날 미성년자라도 그 신분과 재산으로 매월 이십 원의 생활비를 능히 지급할 처지에 도무지 돈을 주지 아니하여 생명이 끝이는 날까지 살아갈 수가 없음으로 이후 이십년간 생활비로 전기 금액을 청구함이라고 하였더라”(『매일신보』 1923년 2월 10일)

‘부모 봉양은 자식의 의무인가?’ 최근 많은 젊은이가 고민하는 문제가 아닌가 한다. ‘부모 봉양’은 이른바 ‘효’와 동일시하던 시기가 있었지만, 이제는 점차 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얼마 전 중국에서 부모의 봉양 의무를 저버린 자녀에 1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는 기사를 접한 바 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줬지만,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지 않는다고 해 반환소송을 제기한 소식은 씁쓸한 현실이다.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지만, 세상이 변하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예시가 아닐까.

부모가 자식에 부양료를 청구한 일이 바로 평택에서도 있었다. 1923년 2월 9일의 일이었다. 지금이야 청년이지만 당시만 해도 노인네 소리를 들어야 했던, 두릉리의 46세 김광덕은 미성년자인 19세의 손자와 친권자에게 부양료 4800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경성지방법원에 제기한 것이다. 소장에는 “매월 20원의 생활비를 지급하며 만약 1개월분이라도 위반해 지급하지 않을 때는 원고는 일평생의 생활비 전부를 한꺼번에 청구하더라도 피고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다짐서 즉, 각서까지 제출했다고 한다. 조부인 김광덕은 앞으로 살날을 20년 정도로 보고 이에 대한 부양료로 4800원을 상정한 것이라고 했다.

결과야 어찌 됐든 예나 지금이나 부모를 모신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는 마음이 짐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부모를 봉양한다는 것은 반드시 돈으로만 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겸애 사상’을 전파했던 묵자가 “길거리에 있는 노인을 너의 친할아버지처럼 대하라”라고 했던 말은 이제 옛 어느 노인의 지나간 말로 치부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아쉬운 시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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