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7월 3일

부도덕한 전쟁, 기억 새롭게 해
강연회 개최, 음주·가무 등 금지

 

 

“振威郡 平澤에서는 支那事變 一週年인 七月 七日을 當하여 一般의 記憶을 새롭게 하여 時局認識을 徹底 涵養코자 지난 三日 振威郡廳 會議室에서 各官公署長, 各小學校長 及 一般有志, 各 團體長을 召集하고 森山 郡守 司會 下에 左記 實行方法을 協議하였다 한다. 一分間 默念, 祈願 並 追悼, 傷病軍 慰藉 並 出征應召 軍人遺族 慰問, 歌舞音曲 停止, 生業報國 行事의 實施, 一菜主義 實行, 講演 講話會 開催”(『매일신보』 1938년 7월 6일)

최근 한·일 양국 간의 관계가 매우 불편하다. 강제동원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에 일본은 일부 품목에 대한 수출 규제로 맞서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를 해결할 실마리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로 인식되고 있는 일본이다. 한·일 양국의 이와 같은 관계의 단초는 일본이 제공했다. 즉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면서 한·일 관계는 선린우호 관계가 깨졌다고 할 수 있다. 해방 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만, 여전히 불편한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일본상품 불매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는 국내의 현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1938년 7월 7일은 지나사변支那事變 즉 중일전쟁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일본이 대륙침략전쟁을 치르면서 식민지 조선은 엄혹한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일본은 중일전쟁은 성전聖戰이라고 하면서 이를 한국인에게 강요하였다. 그러나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부도덕한 침략전쟁’일 뿐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중일전쟁 1주년이 되는 7월 7일에 이 부도덕한 전쟁을 기억하도록 각종 행사를 강제시켰다. 평택도 예외가 아니어서 7월 7일, 이 전쟁을 기억해야만 했다.

당시 일본인 모리야마森山淸吾 평택군수는 4일 전인 7월 3일, 각 관공서의 책임자, 소학교 교장, 지역 유지, 일반 사회단체의 책임자를 소집해 군청에서 회의를 갖고, 7월 7일의 실행사항을 지시하였다. 첫째는 1분간 묵념을 할 것, 둘째는 전쟁에 참여한 부상병의 위로와 전쟁에 참가할 차출 군인 유족을 위문할 것, 셋째는 음주와 가무를 금지할 것, 넷째는 생업에 충실할 것, 다섯째는 매끼 한 개의 채식을 철저히 실시할 것, 여섯째는 강연 강화회를 개최하여 전쟁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할 것 등이었다.

이와 같은 강요된 실천을 통해 한국인에게 일본의 부도덕한 전쟁을 찬양하도록 하였다. 당시 모리야마 군수는 1929년부터 34년까지 진위군청에서 근무한 바 있으며, 1938년부터 1941년까지 군수로 있으면서 일제 말기 평택시민에게 식민 지배를 강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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