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1월 14일

황구나루터 서북 두릉리 일대
의병 20명 일본군 9명과 접전

 

 

 

 

“십사일에 진위군 황구진 서북에 있는 두릉리와 서한리 근처에 의병 이십 명이 와서 잔다는 말 수원수비대에서 듣고 일병 구명이 가다가 접전하였는데, 의병이 퇴거하였다 하고.”(『대한매일신보』 1908년 1월 19일)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제국 일본의 침략은 노골화되었다. 경제적 침략을 시작으로 외교권, 군사권 등 차례로 빼앗은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대한제국을 강점하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선열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피와 땀을 흘렸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갑오개혁을 통해 본격적으로 내정을 간섭하였다. 특히 1895년 단발령과 을미사변은 한민족의 저항으로 이어졌으며,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투쟁이 전개되었다. 1895년에 시작된 을미의병은 1904년 을사의병 그리고 1907년 정미의병으로 이어졌으며 일제 강점 이후에는 독립군으로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와 같은 의병투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평택지역에서의 의병투쟁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의병투쟁은 이른바 지형을 이용하는 게릴라식 전투를 많이 전개하였는데, 평택지역은 대부분 지대가 낮거나 평야 지대였기 때문에 의병들이 활동하기에는 지형적으로 불리하였다. 그래서 의병투쟁이 여타 지역보다는 활발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일부 자료에 의하면 평택에서도 많지 않았지만, 의병투쟁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한매일신보』에 의하면 1908년 1월 14일 의병투쟁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내용인즉 다음과 같다.

수원~화성~평택에 이르며 흐르는 황구지천이 있다. 정미의병이 전개된 지 1년여 지난 1908년 1월 14일 의병 20여 명이 황구진, 즉 황구나루터에서 서북쪽에 있는 두릉리와 서한리 근처에서 머물게 되었다. 이 지역을 지나다가 늦은 저녁이 되어서 숙영을 하게 된 것이다. 일제는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였는데, 마침 두릉리 일대에 의병들이 숙영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가까운 관할 구역인 수원수비대에서 일본군 9명을 출병시켜 의병들과 교전을 하였다. 교전 결과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숙영하려던 의병은 다른 지역으로 퇴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캄캄한 한밤중이라 큰 피해를 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의병은 아마도 경기남부 일대에서 활동한 정주원, 안춘경 의병부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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