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교회를
걱정하지 않도록
개혁해야 한다

 

   
▲ 김해규 소장
평택인문연구소

청년기에 다녔던 교회의 목사님은 참 설교를 못했다. 훌륭한 설교인데도 말투가 어눌해서 전달력이 부족했다. 30년이 지나 그 때 들었던 말씀은 대부분 잊었지만, 아직도 또렷이 기억되는 설교가 있다. ‘기독교인이 비 기독교인보다 낫지 않으면’이라는 설교다.

종교는 세상을 맑게 하는 정화수다. 그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도덕과 윤리가 정화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잘 걸러내어 세상을 청정하게 만드는 것이 종교다. 그래서 윤리나 도덕은 ‘권유’인데 반해 기독교의 교리는 ‘명령’이다.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명령한다. 기독교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사랑’이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메시아를 꿈꿀 때, 강한 자와 가진 자를 굴복시키고 약한 자를 바르게 세우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청빈한 삶도 중요한 가치다. 청빈은 소유욕을 버릴 때 가능하다. 권력과 재물, 심지어 재능까지도 ‘모두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이 청빈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이웃의 고통을 돌아보고 의義를 위해 핍박받는 것을 즐거워해야 한다. 나눔에 넉넉해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그렇게 살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는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역병疫病의 일종이다. 과거 흑사병이나 콜레라처럼 원인을 알 수 없고 치료가 불가능한 전염병이라는 말이다. 민중들은 역병이 창궐하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는 치료방법이 전무했다. 그래서 ‘전염병은 인간의 죄罪로 인한 신의 노여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4세기 유럽에서 창궐한 흑사병은 발병 5년 동안 2500만 명, 200년 동안 600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역병이 창궐하자 인심이 나빠지고 비이성적, 비과학적 행위들이 속출했다. 세상이 불안에 떨고 민중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 교회는 정화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불안한 심리를 이용해 교회가 축재하고, 성당을 크고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내세의 삶을 강조하며 고통당하는 민중들의 삶을 외면했다. 그 결과, 종교개혁이 발생했다. 종교개혁은 민중들의 삶을 회복시키지 못하는, 민중들의 희망을 빼앗은 중세교회의 모순을 개혁해 기독교의 본질을 찾으려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종교개혁 500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는 과거 중세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 교회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본(돈)’을 섬긴다는 비판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예수가 선포했던 평화롭고 평등하며 모두가 행복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기보다, 분단 상황을 이용하고 독재정권에 아부하며 하나님보다 권력과 자본을 앞세워 교회성장을 이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세습은 과거 성직매매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 일제에 협력했고 민주화운동을 가로막았던 전통도 있다. 오늘날까지도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외적 성장에만 주력하며, 남북의 평화관계 회복을 가로막는 교회도 많다.

코로나19와 전광훈 목사에 대한 교회의 대응도 그 가운데 하나다. 현대의 전염병은 모두 치료할 수는 없지만, 생명을 앗아가지 못하도록 과학적 예방조처를 할 수 있다. 그래서 무엇보다 국가와 방역당국을 신뢰하고 온 국민이 협력해야만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교회가 앞장서서 방역지침을 지키고 전염병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고 교회다운 모습이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전광훈 목사의 안하무인격인 행동에 동조하거나 방조했다. 심지어 방역보다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방역지침을 무시하기도 한다.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니 괜찮다고 호도하는 교회도 있다고 한다. 교회당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한, 두 사람의 공동체가 교회라는 말씀은 성경에도 나온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에 대한 우리사회의 시선을 따갑게 느껴야 한다.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지 않도록 개혁해야 한다. 최소한 교회가 사회보다 나은 모습을 보이자.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