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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구국연맹 원심창·이용준·유기석이 계획해
중국 톈진 일본총영사관저에 폭탄을 던지다

 

 

원심창, 1931년 중국으로 망명 후 ‘남화한인청년연맹’ 재건 주도
1932년 12월 16일 일본총영사 투탄의거 위해 거사지 사전 답사
유기문, 부두에 정박 중이던 일본 기선에 폭탄 던졌으나 실패 
이용준, 일본총영사 관저에 폭탄 투척해 관저 외벽 일부 훼손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난 항일 독립투사이자 통일운동가 원심창(元心昌, 1906~1971) 의사가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50년이 되는 해이다. 원심창 의사는 생전에 항일·반독재 통일운동가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불꽃처럼 살다 떠났지만 아나키스트라는 이유만으로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지금까지도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최근 원심창의사기념사업회와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사료발굴과 학술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선양사업도 체계화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평택시사신문>은 원심창 의사 50주기를 기념해 최근 역사학계에서 새롭게 밝혀내고 있는 원심창 의사의 독립투쟁과 건국활동, 평화통일운동 등 평생을 바쳐 이룩한 업적을 조명하기 위해 모두 6회에 걸쳐 기획특집 기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 영국조계 내 빅토리아 공원일대

 

 

 

■ 중국 동지와 연대한 항일구국연맹
 
 주톈진 일본총영사 처단 계획 수립 

원심창은 1931년 봄 일본에서 중국으로 망명한 후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해 재건을 주도했다. 재건에 성공한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일본의 만주 침공 후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서 중국인 간부와 고문으로 함께 활동하던 왕야챠오 王亞樵와 화쥔스 華均實 등 중국인과 연합해 ‘항일구국연맹 抗日救國聯盟’이라는 국제아나키즘단체를 결성하고, 직접행동의 실천을 위해 ‘흑색공포단 黑色恐怖團’을 조직했다. 이후 흑색공포단은 중국 각지에서 투탄의거를 시도했다. 이들은 일본이 중국 동북을 점령한 뒤 화베이 華北를 다음 침략대상으로 삼고 친일정권 수립을 기도하자 베이징, 톈진의 일본 침략 기관과 인사들에 대한 처단을 시도했다.    

1932년 11월 10일경 베이징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유기석이 상하이로 향했다. ‘톈진투탄의거’라는 자신의 계획에 동참해줄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서였다. 11월 12~13일경 ‘항일구국연맹’을 이끌고 있던 원심창과 이용준 두 사람이 이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유기석의 숙소를 찾았다. 유기석은 “무정부공산사회를 건설하고 영구히 지속하려면 일본, 중국은 물론 전 세계에 아나키즘 사상을 확대하지 않으면 안 되며, 필요한 아나키즘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투탄의거를 계획하고 있다”며 주톈진 일본총영사인 쿠와시마 슈케이 桑島主計 처단계획을 밝히고, 함께 해주기를 청했다. 두 사람은 이 자리에서 쿠와시마 처단계획에 함께 할 것을 결의했다. 

쿠와시마 처단계획은 ‘항일구국연맹’의 활동 방향과 일치하는 것으로, 1932년 12월 현재까지 행동대인 ‘흑색공포단’을 통해 시도한 직접투쟁의 대상 대부분이 현지의 일본 영사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일본의 대륙 침략을 진두지휘하는 주중일본공사가 ‘흑색공포단’의 주요 제거대상이었던 것이다. 톈진에 이어 상하이에서 시도한 소위 ‘육삼정의거’의 투탄대상 역시 아리요시 아키라 有吉公使였다는 점으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중국에 재류하며 침략행위를 주도하고 있는 일본 재중 공사관과 공사를 제거함으로써 대륙침략을 저지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1932년 쿠와시마는 본국에서 톈진으로 돌아온 후 줄곧 일본의 침략정책의 선봉에 서 있었고, 이미 3월 만주국이 수립되면서 일본의 다음 목적지가 화베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이에 다음의 제거대상 역시 자연스럽게 톈진의 쿠와시마로 결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 일본총영사관저 자리의 현재 모습
▲ 일본톈진주둔군 사령부

 

■ 일본총영사 투탄의거를 위해
  원심창·이용준 일행 톈진 출발

1932년 11월 19일 원심창과 이용준 두 사람은 ‘톈진투탄의거’를 위해 상하이를 출발했다. 3일 후인 11월 21일 베이징에 도착한 원심창, 이용준은 유기석의 동생 유기문이 머물고 있던 베이징 북문 부근 중국여관에 투숙했다. 거사 실행과 관련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베이징에 도착한 후 2주가 지났을 무렵인 12월 3일경이었다. 경비와 무기 등 준비에 2주간의 시간이 소요됐기 때문이다. 원심창, 이용준 두 사람이 유기문의 숙소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유기석은 의거에 필요한 폭탄, 자금 마련에 여념이 없었다. 

12월 8일경 밤 드디어 유기석이 원심창·이용준 두 사람의 숙소로 찾아왔다. 그리고 처음으로 거사에 관한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냈다. 세 사람은 톈진에서 항일파괴공작 즉 ‘톈진투탄의거’의 실행과 관련된 세부 내용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의거에 필요한 폭탄 세 개는 이미 마련한 상태였으므로 내일 밤 톈진을 향해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숙소를 떠난 유기석은 예정대로 다음날인 12월 14일 오후 5시쯤 숙소로 찾아왔고, 세 사람은 오후 7시경 함께 숙소를 나섰다. 이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밤 8시경 베이징에서 출발하는 야간열차를 타고 12시경 톈진에 도착했다. 

톈진에 도착한 다음날인 12월 15일 오전 원심창·이용준·유기석 세 사람은 먼저 투탄 장소를 결정하기로 하고 숙소를 나섰다. 쿠와시마를 처단하기로 했지만, 어디에서 그를 처단할 것인지 등의 상세한 계획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에 톈진의 중국인 거리와 일본조계 경계선을 돌아보고 투척 장소로 일본군사령부 1개소를 정했다. 톈진 지리에 비교적 익숙했던 유기석은 일본군사령부 외에도 영국조계, 프랑스조계 각지를 돌아보며 의거 대상을 물색했고, 그 결과 영국조계 내 일본총영사관저, 프랑스조계에 정박 중인 일본 기선 등의 존재를 동료들에게 보고했다. 다만 일본총영사관 관저까지는 거리가 있어 실행하기 어려운 상황이니 자신이 단독으로 결행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원심창·이용준 두 사람은 유기석의 의견에 반대했으나, 유기석은 직접 행동에 참여해 본 적이 없는 이용준을 걱정했다. 단순히 쿠와시마를 처단한다고 하더라도 톈진에서 큰 파란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며, 그 영향 또한 크지 않을 것이므로 이런 일을 위해 동지를 희생시키는 일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세 사람은 직접 현장을 시찰할 필요가 있음에 동의했다. 저녁 식사 후 7시경 세 사람은 숙소를 나와 인력거로 영국조계에 있는 일본영사관저 시찰을 시작했다. 유기석의 말대로 관저 부근의 사면에는 중국인 병사가 보초를 서고 있었으며, 부근 통로 역시 사람의 왕래가 적어 매우 적막한 거리였다. 현장 시찰 후 세 사람 모두 ‘의거를 실행하기에 매우 곤란한 장소’라고 판단했다.

시찰을 끝낸 후 이들은 일본영사관저 부근의 경계가 매우 삼엄하지만, 그대로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다만 이곳은 거사 도중 희생자가 나올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으므로 이용준은 자신이 단독으로 실행하겠다고 자원했다. 많은 희생자가 나오면 흑색공포단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또 취안저우 泉州와 푸젠 福建 등지로부터 약속받은 자금 지원이 성사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대신 원심창과 유기석 두 사람에게는 일본군사령부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유기석은 원심창과 함께 거사를 단행하는 것에 반대했다. 원심창이 톈진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 거사 후 피신에 불편하거나 위험에 처할 수 있어 본인의 단독 수행을 주장했다. 결국 톈진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원심창 대신 유기문이 일본기선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고, 원심창은 곧바로 상하이로 돌아가 이러한 정황을 동지들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맡기로 했다. 

▲ 프랑스조계 밍링 鳴領부두
▲ 빅토리아 공원과 맞은 편 주진일본총영사관저

 

 

 ■ 주톈진일본총영사 관저에
    폭탄 던져 침략정책에 큰 타격 

결행일은 12월 16일 오후 6시 30분으로 정해졌다. 실행을 앞둔 15일 밤 원심창과 이용준은 먼저 유기석에게 폭탄 사용방법을 배워야했다. 그리고 결행 당일인 16일 오전 10시, 원심창이 먼저 상하이로 돌아가기 위한 필요경비로 40불, 의거 직후 베이징으로 피신하기로 한 이용준은 베이징으로 갈 여비 30불을 전달받는 등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원심창은 정오 경 두 사람 보다 먼저 숙소에서 나와 톈진역 앞에 있는 모 중국인 하숙으로 이동했다. 의거 직후에 움직이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이용준·유기문 두 명이 오후 6시 30분 의거를 실행한 즉시 밤 9시 50분 톈진 발 야간열차를 이용해 상하이로 출발할 계획이었다.  

일본군사령부에 폭탄을 던지기로 한 유기석은 이 일을 동생 유기문에게 맡겼다. 결행 당일 오후 5시 30분경 친동생 유기문을 만나 소지하고 있던 폭탄 두 개를 건네줬다. 하지만 유기문이 있던 장소에서 사령부까지의 거리가 멀어 결행 약속 시각인 6시 반까지 도착할 수 없었다. 이에 인근 프랑스조계 부두에 정박 중이던 군수물자와 육군 수송을 담당하던 일본기선에 폭탄을 던지기로 했다. 유기문은 먼저 작은 배를 타고 기선에 접근하여 폭탄을 던졌으나, 폭탄이 기선에 이르지 못하고 바다에 떨어지고 말았다. 유기문은 현장에서 체포될 경우 나머지 폭탄으로 자결을 결심했으나, 이마저도 실행하지 못했다. 결국 유기문은 의거에 실패하고 숙소로 돌아왔고,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원심창은 그에게 즉시 베이징으로 돌아가기를 권고했다. 

한편, 영사관저에 폭탄을 던지기로 한 이용준은 예정대로 16일 오후 6시 45분 영국조계 중졔 中街 미둬스다오 米多士道에 있는 톈진 일본총영사관저에 폭탄을 던지기로 했다. 쿠와시마 총영사는 6시 업무를 마치고 승용차를 이용해 총영사관에서 관저로 퇴근하고는 했다. 예정대로 승용차가 6시 45분경 관저 정문 입구에 도착했다. 이때 이용준은 톈진총영사 관저와 도로를 사이에 둔 빅토리아공원에서 몰래 몸을 숨긴 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쿠와시마 총영사가 관저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그를 향해 폭탄을 투척했다. 폭탄은 외벽 일부를 훼손시키고 길옆 배수구를 파괴했을 뿐 쿠와시마 처단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폭탄의 위력이 아주 강해 정원을 진동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한편 우려와는 달리 이용준은 의거 후 무사히 톈진을 빠져나왔으며, 원심창 역시 계획대로 16일 밤 8시 30분에 숙소를 나와 9시 15분발 기차를 탔다. 그러나 의거가 일어난 직후였으므로 혹시 있을 위험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진푸센 津浦線을 타지 않고, 난징 南京  푸커우 행 浦口行을 탄 뒤 다시 선박으로 갈아타고 무사히 상하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항일구국연맹’의 ‘톈진투탄의거’는 비록 계획한 목표를 충분히 달성하지 못했지만, 화베이에 대한 일본의 침략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재중 아나키즘세력이 공동으로 실행해 총영사가 교체되는 등 일본의 침략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다는 데 그 의미가 있었다. 

 

▲ 글·사진 양지선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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