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통해 시대를 읽고
미래를 예견하는 지혜를
위드 코로나가
가르쳐주지 않는가

 

 

   
▲ 정재우 대표
가족행복학교

현재를 ‘위드 코로나 시대’라고 한다. 워낙 ‘위드 유’라는 말을 많이 들어와서인지 어색하진 않지만 ‘코로나19와 함께’라니 어찌 된 일인가? 누군가와 함께하는 일을 퍽 불편하게 생각했던 우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위드’하라고 한다. 싫든 좋든 관계없이.

매일 매 순간 경험하는 위드 코로나 풍경을 스케치해본다. 주변에서 흔하게 만나는 선별검사소 앞 줄서기 광경이 보여주는 두려움들. 매일 시청 공보과에서 날아오는 코로나 확진환자 숫자와 방역정보 공지문자들. 아파트 단지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이웃과의 씁쓸한 얼굴 없는 눈인사들. 어딜 들어가도 온도측정과 QR코드를 찍어야 통과하는 묘한 세상 살기. 식당가서 넷씩 띄어 앉지만 그 이상 단체모임 하면서 아닌척하기. 오미크론의 대역습은 이미 확진환자 1만 명을 넘어 2만 명대로 브레이크 없이 달려간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위드 코로나의 쓸모’를 생각해본다. 코로나 팬데믹은 진정 쓸데없는 역병이기만 할까? 전에 없던 유익함을 던져준 사실은 없었나를 생각해본다. 나름으로 쓸모를 찾아 위안으로 삼는 일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먼저 ‘하나가 되는 것’의 소중함을 재발견했다. 이 역병에 맞서기 위해 세계가 하나 되어야 하고, 온 국민이 자국을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PCR검사, 백신 접종, 방역수칙, 여행자수칙 등 하나가 되어 지켜야 이길 수 있다. 다시금 연대와 화합의 가치를 발견했다. 어떤 위기를 만나도 하나 되면 희망이 있다.

또 한 가지는 ‘도덕적 사회로의 회복’이다. 1932년에 발표한 라인홀드 리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양심과 도덕을 실천해도 사회집단은 비도덕적이어서 개인이 비도덕적 사회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사회적 정책과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위드 코로나 시대를 맞아 도덕적 사회로의 회귀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더불어 공존하고 공생할 뿐만 아니라 공영하려면 우리 사회가 도덕적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국가나 기업을 운영하거나 작은 시민단체를 운영할 때에도 도덕적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 지도자를 선택할 때에도 엄격하게 도덕적 기준을 적용해야 하겠다. 그것이 사회공동체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드 코로나의 쓸모는  ‘역사의 쓸모 재발견’이다. 최태성의 저서 <역사의 쓸모>에 보면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고 한다. 역사에 나오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며 길을 묻는 것이라고 한다. 어느 때나 인간이 살아가는 형태는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시치미를 떼는 일을 주변에서 자주 보아 왔다. ‘중대재해법’이 발효되는 날에도 노동 현장에서 중대재해로 덧없이 쓰러져가는 노동자의 생명을 본다. 이제는 다르게 살아보자.

우린 역사를 통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최근 역사 강좌가 인기몰이하고 있다. 역사와 대화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뜻한다. 역사를 통해 시대를 읽고 미래를 예견하는 지혜를 위드 코로나가 가르쳐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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