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애가 넘치는 세상
약자를 돌보는 사명이 
살아있는 세상을
꾸려가야 한다

 

 

   
▲ 정재우 대표
가족행복학교

아마 25년쯤 지난 일일 게다.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안식년 휴가를 받아 호주로 떠난 적이 있었다. 가족 네 사람은 배낭족으로 걷기도 하고 때론 렌트한 승용차를 타고 여러 곳을 다녔다. 고속도로와 일반도로를 주행하며 자주 휴게소에 들렀다. 한참 산길과 숲길을 지나고 계곡을 지나오며 조그만 간이 휴게소에도 들렀다. 숲 길가에 있는 작은 간이 휴게소 화장실을 보며 놀랐다. 화장실이 1m 정도 지상에서 높게 설치되어 있었는데 사정은 장애인을 배려한 휠체어 로드를 길게 만드느라 그렇게 한 것이었다. 아, 얼마나 인간다운 배려인가?

언젠가는 교회를 호스피스기관에 대관해 호스피스의 밤 행사를 할 때였다. 휠체어 장애인 가수를 초청해 강연을 듣는 시간이었다. 승강기를 타고 3층 본당까지 올라와 강단으로 이동하려다가 난관에 부딪혔다. 강단으로 오를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결국 강사를 설득해 휠체어를 탄 채로 여러 사람이 들어서 옮겼다. 그는 불쾌한 감정과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장애인을 배려하지 못하는 사례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 등록된 장애인이 263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들은 우리 곁에 함께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을 위한 배려가 아직은 충분하지 않은 현실이다. 선진국의 기준이 무엇인가? 그것은 약자와 공존하는 사회를 이룬 나라를 말한다.

엊그제 신문에서 시각장애인 A 모 국회의원이 안내견과 함께 지하철 시위 현장에서 무릎을 꿇은 모습을 보았다. 좀처럼 그녀의 모습이 눈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정치인이기에 정치적 계산을 하고 한 행동이었을까? 국민에게 호소하려는 진심을 보이기 위한 행동이었을까? 어쨌든 가슴이 찡하게 아려왔다. 전국장애인연합회가 정부에 항의하는 수단으로 경복궁역에서 시위 중인 현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침 출근길을 가로막는 장애인들의 행렬에 불특정 다수인 시민들은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필자는 그들 시위의 입장에 서서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사회적 약자인 시각장애인이 무릎을 꿇은 사건의 상징적 의미를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 평화와 화합을 이루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어느 누구도 배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약자가 무릎 꿇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들의 요구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 달라는 단순한 요구다. 우크라이나는 전쟁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약자를 대변하고 있다. 그들의 아픔에 자유와 인류애를 가진 세계시민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약자와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다.

약자는 멀리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함께 살아가고 있다. 독거노인, 탈북인과 가정, 결혼이주민, 외국인노동자, 가출청소년, 미혼모, 미취업 청년들, 그리고 거동 불편 장애인이 얼마든지 있다. 그들이 스스로 일어서고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우리가 배려해야 한다.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한다. 우리가 꾸려갈 세상은 그런 세상이다. 더불어 감싸고 화합하는 인간애가 물씬 넘치는 세상, 약자를 돌보며 책임지는 사명이 살아있는 세상이다. 그런데 내 눈에는 아직도 애처로운 약자의 무릎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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