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쑥고개_02



쑥고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 쑥고개 북쪽 시작지점 부근 고개에서 본 오산 방향(1980년대 중반).화면 중앙에 보이는 트럭 뒤편, 지금의 우리은행 송탄지점 부근부터가 쑥고개의 북쪽 시작이다.

 

 

   
▲ 이수연
한국사진작가협회 전 부이사장

연재를 시작하려 하자 덜컥 겁부터 난다. 희미해져 가는 기억 때문이다. 

기억을 믿지 말라는 아내의 말이 아니더라도, 분명히 그렇다고 믿고 있던 것들이 자료를 찾아보면 번번이 다른 경우가 많아진다. 거기에 한 달에 한 번, 많아야 신문 반 페이지 분량쯤으로 생각했던 이 연재가 갑작스레 양도 늘고 간격도 당겨졌다. 말은 짧고 간략할수록 좋은 법 아닌가. 말이 많아지면 실수도 생기는 법인데 촉박하게 글을 쓰려면 더욱 그럴 것 같다. 또 겁나는 것은 개인적 기억에 의존해서 추억으로 남은 부분을 사진과 함께 전하려는 것이 자칫 사실을 왜곡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겠다 싶다는 생각이 커서이다. 미리 말씀드리거니와 역사를 밝히려는 것도, 숨어 있던 사실을 발굴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가끔 거슬리는 부분은 너그럽게 살펴서 지도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쑥고개 북쪽 시작지점에서 본 남쪽 방향. 옛 송탄시외버스터미널 자리이자 지금의 국민은행 자리이다(1997년경).

 

■ 엄청난 고갯길 쑥고개?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 말씀이 5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난다. 부임하려고 용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송탄행 버스를 타려는 데 아무리 찾아도 쑥고개 가는 버스만 있더라나. ‘고개가 얼마나 높기에, 얼마나 깡촌이기에’ 한걱정하며 오셨단다. 

고속도로가 없던 시절, 서울서 버스 타고 송탄에 오려면 1번 국도를 이용해야 했다. 한강을 넘어 노량진, 영등포를 거쳐 시흥(지금의 서울 금천), 안양, 수원을 경유하는 노선이다. 버스 앞에 큼지막이 붙이는 주요 목적지에 송탄은 없었고 겨우 쪽 표지로 쑥고개라고 붙이고 다녔다. 송탄으로 부르기 운동 당시 이 표지를 붙인 버스는 정류장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 바로 그것이다.

그 쑥고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오늘(4월 29일), 북부문예회관 전시실에서 열고 있는 ‘기억과 추억 사이 : 쑥고개’ 전시에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관람객이 대뜸 

“쑥고개가 어딥니까?” 

하고 묻는다. 송탄에 오래 살아 지리를 잘 안다는, 나이도 제법 든 분이었다. 

고개를 뜻하는 말로 령嶺 치峙 현峴 등이 있다. 그중에 쑥고개의 한자 표기가 탄현인 것을 보면 쑥이 아니라 숯으로서, 제일 세가 약한 고개쯤 되겠다. 짧은 생각에는 산 하나를 넘어가는 정도일 것만 같은데 송탄읍 시절의 행정동이었던 탄현리 일대는 야트막한 언덕의 시작일 뿐 좌동을 지나 복창동 입구까지 한참 평지 길을 걸어야 다시 내리막이 나오는 지형이었다. 

평택군지平澤郡誌는 탄현마을을 소개하면서 ‘참나무가 울창하여 숯을 굽는 곳이 많았다. 하여 숯장수들이 많이 왕래하였는데 고개가 높아 매일 수십 명씩 휴식객이 몰렸다 한다’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 높이를 고개라고 할 수 있을까? ‘걸어 다니던 게 일상이던 시절에 쑥고개는 높은 고개였을 것’이라는 설명에도 갸우뚱한 고개는 쉽게 바로 돌아오지 않는다, 

생각하길 몇 차례. 인체의 허리 곡선을 따라가듯 산의 옆구리를 깎아가며 낸 경부선 철길을 지우고 복창육교 자리의 끊긴 허리를 메운 뒤 그 일대가 산과 숲이었다고 그려보면 왕래가 잦던 이 언덕길은 높든 낮든 이름을 붙였을 것 같다. 숯고개라고.

▲ 쑥고개 중간지점. 옛 지명으로 ‘좌동’ 일대이다. 쑥고개는 남북 초입의 야트막한 경사면을 빼면 이렇듯 평탄한 길이 길게 이어지는 지형이어서 이게 정말 고갯길인가 할 정도다(1980년대 중반).
▲ 참나무숲. 지산초등학교 건축 현장(사진 왼쪽)과 길 하나 건너 온전히 보전된 참나무 숲(사진 가운데 지산초록도서관 뒤편) 그리고 참나무(서정동 주공2단지 경내, 현 포스코더샵아파트 옛 모습) 이 세 장의 사진은 하나로 연결된 지역이었다.

 

 

■ 그 많은 숯의 재료는 어디서 나올까?

하지만 아직 궁금증이 남는다. 애오라지 현재 시점으로 보고 생각하는 아둔함 때문이다. 

1994년에 발간한 송탄시사松炭市史는 서탄면 적봉리 일대에 숯을 굽는 가마가 여럿 있었고 구운 숯을 궁중에 납품했다고 적고 있다. 

서탄면 적봉리는 서탄의 남쪽과 송탄의 서쪽이 만나는 곳쯤에 있는 마을로 지금은 대부분 미군기지에 편입되고 일부만 남았는데 쑥고개와는 제법 먼 거리다. 나무가 없어 산이 붉게 보이는 봉우리라는 뜻의 적봉赤峯이니 숯의 재료가 되던 참나무는 어디서 구했을까? 

지산동에 아카시아밭 또는 파라다이스로 부르던 참나무 군락지가 있어 겨우 궁금증의 실마리를 유추할 수 있는데 전문가의 설명에 의하면 적봉리 너머 장등리에도 숯가마가 여럿 있었으며, 그들은 쑥고개에서 거기까지 이어지던 산등성이는 물론 좌동, 지산동 그리고 송북초등학교 지나 동막 일대까지 아주 넓고 울창한 군락지에서 참나무를 구했을 것이라고 하니 겨우 이해할 만하다.

그렇듯 울창하던 참나무 숲은 미군기지가 들어서고 피란민과 이주민들이 기지 주변의 산등성이에 야금야금 판잣집을 지으면서 모습을 감춰간 것이다. 도시가 팽창하면서 이런 현상은 가속화되었고 지금의 쑥고개는 숲을 상상할 수도 없고 고개랄 수도 없는 모양으로 남았다. 

 

▲ 쑥고개 남쪽 시작지점. 현재의 서정동행정복지센터 부근(1986년경). 이때만 해도 왕복 2차선 1번 국도가 경부선 철길과 나란히 달렸다. 평택에서 서정리를 거쳐 온 길은 쑥고갯길로 이어져 오산, 수원으로 올라갔다. 방음벽 없는 경부 철길과 완행버스 그리고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맞아 조성한 도로변 화단이 당시를 말해준다.

 

■ 기억 속 1번 국도의 영광

쑥고개는 1980년대 말까지도 1번 국도였다. 비록 왕복 2차로에 불과했지만, 평택의 모든 구간이 그랬듯 경부선 철길과 나란히 가면서 주요 교통로 역할을 했다. 이는 조선조 당시 마을 단위로 바치던 현물 조세를 배로 옮기기 위해 설치한 해창海倉(고덕면 해창리 유래)까지의 주요 통로로서 고개 중간에 주막이 있었던 주요 교통로였다고 하니 단순하게 마루 하나 넘는 길이 아니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1번 국도 신작로를 이리로 낸 것도 그런 이유의 연장선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남쪽 서정동행정복지센터 부근에서 올라오는 쑥고갯길은 지금의 국민은행과 우리은행 송탄지점쯤 초입을 거쳐 북상하는데 1970년대 중반, 탄현리 길옆 집들을 헐고 한 차례 넓혔어도 결국 외곽으로 뚫린 우회도로에 1번 국도의 자리를 내주고 만다. 이제는 아련한 추억 속으로 사라진 쑥고갯길의 영광일 뿐이다. 

아~ 옛날이여~ 

 

▲ 제일교회 첨탑에서 본 밀월동과 복창동 일대(1994년). 사진에서 옛날 울창하던 숲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오래전 이곳은 숲이 우거진 산이었다고 한다. 멀리 보이는 산줄기의 왼쪽 봉우리가 부락산 일대이며, 그 아래쪽에 송탄시청(현 평택시 송탄출장소)이 있다.

(도움말 : 김해규/평택인문연구소장, 최치선/평택학연구소 상임위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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