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쑥고개_19

 

교통대와 땡땡거리

 

 

▲ 1980년대 말의 교통대. 화면 가운데 도로가 미군 부대로 들어가는 길로 중앙 철탑이 보이는 곳에서 경부선 철길과 교차한다. 이곳에 땡땡거리라고 부르는 건널목이 있었으며, 승합차 바로 앞에서는 군인이 교통정리를 했다고 해서 이 일대를 교통대라고 부른다.

 

 

   
▲ 이수연
한국사진작가협회
전 부이사장

■ 교통대, 드럼통 잘라 엎어놓은 위에서 군인이 교통정리 하던 곳

초등학교 4~5학년쯤의 일인 듯싶다. 미술 시간에 매일 등하교하던 길목의 교통대에서 바라본 북쪽 풍경을 그렸다. 집도 그리고 나무도 그리고 멀리 보이는 논도 그려 넣었다. 이제 하늘을 파란색으로 채워야 할 순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집과 집 사이, 하늘과 땅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어디까지 파란색으로 그려야 할지 도무지 몰랐다. 나름 고민하다가 하늘과 땅이 맞닿는 부분을 허옇게 남긴 채 제출했다. 그 둘이 맞닿아 보이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던 탓이다. 

‘교통대’는 오산에서 내려온 1번 국도가 쑥고개의 언덕이 시작되는 북쪽 초입에서 T자로 갈라지는 지점에 있었다. 내 기억에는 드럼통을 잘라 엎어놓은 것처럼 생긴 그 위에서 군인이 올라가 호각 불며 지나가는 차를 이리저리 교통 정리하던 곳이다. 그래서 교통대라고 불렀다. 군인이 교통정리를 한 것은 그 지점에서 경부선 철길 쪽으로 미군 부대 가는 길이 갈라지기 때문이다. 

학교 파하고 집에 오던 길에 친구랑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군인의 수신호 때문에 차가 방향을 바꾸는 것이냐 자동차가 보내는 신호를 보고 군인이 수신호를 하는 것이냐 하던 입씨름이다. 교통신호등 하나 없던 시절의 웃픈 풍경이다.

1960년대 중반쯤의 기억이던 그림 속 교통대 삼거리 일대는 높아야 2~3층 정도의 건물들이 자리 잡았고 그 건물들은 병원, 건재상, 여관, 두부 공장, 약국, 사진관 그리고 버스정류장 등등이 있었다. 북측 오산 쪽으로는 듬성듬성하게 집이 있었을 뿐 좌우로는 온통 논이었다. 그러나 교통대 일대는 미군 부대 정문 앞처럼 대중적 상업 공간은 아니었어도 쑥고개의 또 다른 중심지였다.

참, 교통대에서 땡땡거리 방향으로 왼쪽에 빵공장과 ‘아이스케키’ 빙과공장도 있었다. 

빵공장에서는 지금의 베이커리처럼 온갖 빵을 구워냈다. 둥근 밀가루 빵 위에 넓적하게 초콜릿을 얹은 ‘초코빵’은 기실 설탕을 중탕해서 녹인 뒤 열심히 저어 하얗게 만들고 거기에 캐러멜색소를 탄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그렇게 만든 빵을 작은 가게마다 받아다 팔았다. 

빙과공장은 입구에서부터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암모니아 냄새였다. 냄새와는 별개로 길쭉하게 생긴 얼음덩이에 젓가락처럼 생긴 나무 한쪽을 꽂은 ‘아이스케키’는 어릴 적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얼마 뒤에 ‘하드’도 보았다. 명함 크기보다 약간 더 컸던 ‘아이스하드’는 부드럽다고 할까 퍼석거렸다고 할까. 빵공장과 달리 아이스케키는 주로 사내아이들이 팔러 다녔다. 이중벽 사이에 톱밥(스티로폼?)을 채운 보냉 통 나무 상자에 몇 십 개씩 담아 어깨에 메고 길거리를 다니며 특유의 억양으로 ‘아이스께끼’를 외쳤다. 한낮을 넘기면 ‘아이스케끼’는 상당히 녹아서 물이 질질 흐르기 일쑤였다. 신상품이었던 하드는 꽤 비쌌는데 쑥고개까지 내려온 ‘삼강 하드’의 쫄깃한 맛에 빙과공장이 문을 닫으며 토종 아이스케키는 사라진다.

▲ 땡땡거리 폐쇄 이후. 경부선 철길이 크게 휘어지는 곳 위로 보이는 신장육교를 만들고 땡땡거리 건널목을 폐쇄했다. 화면 중앙의 두 철탑을 직선으로 잇는 자리에 땡땡거리가 있었다(1980년대).
▲ 교통대. 사진 속에서는 경찰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지만 이전에는 미군 부대 진입 차량을 위한 교통정리를 했다. 이 일대는 쑥고개의 또 다른 중심지이기도 했다(인터넷 캡처, 연도 미상).
▲ 1991년의 교통대 일대. 화면 오른쪽이 옛 송탄터미널이고 왼쪽 택시가 서 있는 곳이 교통대다. 시내버스가 오는 방향은 오산 쪽인데 1960년대 그 방향은 집도 몇 채 없이 좌우로 논이었다. 이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카메라를 돌리면 되었을 터미널 풍경을 찍지 않은 게 몹시 아쉽다.

 

■ ‘땡땡땡땡’ 기차 진입 신호가 만든 땡땡거리 건널목 

교통대에서 서쪽 위로 경부선 철길이 지나갔다. 적봉 신호장 관리였던지 적봉 가도라고 쪽 간판을 단 작은 초소에 간수가 근무하다가 땡땡땡땡 하고 신호가 울리면 얼른 나가 양방향에 설치한 차단기를 내려 차량을 통제한다. 그 신호 소리 때문에 땡땡거리라고 이름 붙은 건널목은 1976년에 우회도로인 신장육교를 만들면서 폐쇄되고 북쪽으로 한 발짝 옮겨 철길을 넘는 보행육교로 대체된다. 그리고 다시 한참 뒤 땡땡 거리에 보행 전용 지하도를 개설하면서 그 육교도 철거된다.     

땡땡거리는 분지처럼 갇힌 미군 부대 주변 마을의 유일하다시피 한 출입로였다. 서울 가는 버스를 탈 때도, 서정리역으로 기차 타러 갈 때도, 동네에서 유일했던 초등학교 갈 때도 이 길로 지나가야만 했다. 

제일극장도 교통대 일대의 주요 공간이었다. 삼보극장과 서정극장이 단층이었던데 비해 2층이던 제일극장은 중고교 시절에 단체 관람을 제일 많이 했던 곳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 때는 여학생들로 구성된 학교 고전무용반 발표회도 이곳을 빌려 했다. 재개봉관이지만 간혹 재재개봉관처럼 영화 두 편을 동시에 상영하기도 했으나 쇼 공연단이 이 극장을 주로 사용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후라이 보이 곽규석이 사회를 보던 쇼 무대에서 ‘사랑은 눈물의 씨앗’으로 막 스타덤에 오르던 나훈아도 보았고, 태현실 남진 나훈아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 만들어 어린 나이에 데뷔한 태진아도 쇼단의 단골 가수였다. 이주일의 코믹 공연은 훗날 이리 기차역 폭발 사고 뒤에 방송 출연하면서 코미디언 이상해와 짝을 이룬 공연으로 다시 보게 된다. 

인기 가수가 출연할 때면 극장 앞에 여성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주로 업소 출입 여성들로 알고 있는데 공연을 마친 가수는 그들을 피해 극장 옆 제일여관 쪽으로 난 후문을 통해 빠져나가곤 했다. 경부선 철길 옆에 있던 제일여관은 보통 이틀 동안 공연하던 쇼단이 단골로 묵던 곳이기도 하다. 

▲ 교통대에서 바라본 땡땡 거리 방향(1990년대). 1960년대에 화면 속 세탁소쯤에 목조 2층으로 된 빙과공장이 있었고, 화면 바깥 아래의 골목 안쪽에 부래옥이라는 제빵공장이 있었다.
▲ 위쪽 사진. 미군 부대 방향(경부선 하행선 방향, 서쪽)에 설치한 건널목 초소. 멀리서 기차가 다가오면 땡땡땡땡 하고 신호가 울리면 간수가 나가서 양방향의 차단기를 손으로 내려 차량을 통제했다(아래쪽 사진, 인터넷 캡처, 연도 미상).

 

 

■ 나훈아 태진아 이주일과 추억의 쇼 단

극장 옆에서 작은 가게를 하며 살던 덕에 영화와 쇼는 참 많이 봤다. 매표 마감은 마지막 상영 전에 하는 ‘대한뉘우스’가 끝날 때다. 그러면 입장권을 받던 ‘기도’가 퇴근하고 청소나 매점 일하던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싼값의 현금 입장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부수입 올리던 이들을 알기에 무시로 극장을 드나들 수 있었던 시절의 기억이다. 

교통대 부근에서 언급할만한 에피소드가 또 있다. 훗날 제일극장을 임시 건물로 사용한 상업은행이 개점 초기에 오산비행장 이름을 따서 ‘오산지점’으로 이름을 붙였다가 송탄청년회의소가 벌인 ‘송탄이라 부르기’ 캠페인으로 송탄지점으로 바꾼 것과 한 발짝만 더 움직였어도 찍을 수 있었던 구 송탄터미널 사진에 대한 내 미련이다. 몇 번이고 그 앞에서 다른 방향을 찍으면서도 결국 외면해 버린 아쉬움이다. 하긴 못 찍은 사진이 어디 그뿐 이랴만.

▲ 땡땡거리 폐쇄에 따라 대체시설로 만든 육교(1978년 사진).
▲ 보행자 육교 설치 후 육교 왼쪽 아래에 가건물을 짓고 장사하는 모습(연도 미상).
▲ 육교 철거 후 땡땡거리 지하로 뚫은 지하도. 사진 속 작품들은 평택 사진작가들의 사진 전시 광경이다(2020년).
▲ 제일극장. 송탄의 첫 은행이던 상업은행이 맞은편으로 경쟁 은행이 이전해오면서 옛 제일극장을 임시 영업장으로 쓰던 모습이다(1990년대). 오산지점으로 문을 연 상업은행은 송탄 바로 부르기 캠페인으로 지점 이름을 바꿨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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