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너무도
무례無禮하고 무도無道하다
이러고도 우리가
문명 세계를 말할 수 있는가

 

   
▲ 백승종
역사학자

공자의 수제자 안회顔回는 평생 꼭 한 번 스승에게 질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仁이란 무엇입니까?” 의미심장한 이 질문에 대한 스승의 대답은 짧았다. “극기복례克己復禮”, 이 네 글자였다. “자아를 이기고 예禮를 회복하라”

예를 회복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의 상태 즉, 가장 적절한 상태로 되돌아가라는 뜻이었다. 공자의 대답을 마음에 새겨보았다. 자아의 현재 상태와 무관하게 사람이면 누구나 본래 가슴속에 예를 갖추고 있었다는 말이 아닐까 한다. 이것은 <장자>의 ‘선성편繕性篇’에 나오는 ‘복기초復其初’와도 같은 뜻이다. 풀이하면, 그 처음을 되살린다는 것이다. 더 생각해보니, 맹자의 이른바 성선설性善說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는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럴진대 선비가 추구하는 ‘수기修己’ 곧 제 몸을 닦는다는 행위는 그 본질이 여기에 있었다. 자아에 내재된 본성의 회복, 이것이 바로 ‘예’로 표현되는 도덕적 질서를 회복하는 실천운동이었던 것이다.

조선 선비들도 공맹孔孟과 마음가짐이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대학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여덟 단계로 설정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길을 걸었단 말이다.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라고 했다. 선비들은 자신의 힘이 닿는 대로 그 길을 성실하게 나아갔다. 그러나 누구도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데 이르지는 못하였고, 나라를 옳게 다스린 이도 거의 없었다. 자신의 언행을 삼가고 집안을 평안하게 하기도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른바 8단계의 수양이 허무맹랑한 것일 수 있다. 한 단계를 지나야만 그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불필요하고 복잡한 헛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옛사람이 자신의 언행을 부지런히 살피고 삼간 태도는 참으로 귀하지 않은가.

요즘에 배웠다는 사람들의 행색을 한번 들여다보라. 잘났다고 군중 앞에서 설치는 사람들이 쏟아내는 지극히 천박한 말씨를 보라. 탐욕에 푹 빠져 제 잘못은 조금도 보지 못하면서 남의 잘못은 어찌 그리 무정하게 물고 뜯는지, 기절할 지경이다. 오늘날에 조금이라도 교양이 있는 시민이라면 눈과 귀를 가리지 않고서는 이 풍진 세월을 건너갈 수 없을 지경이다.

저렇게 잘난 자칭, 타칭의 지도자들로부터 오늘은 또 무슨 악담이 쏟아지고, 두 눈 뜨고 차마 보기 민망한 사태가 다시 벌어질지 몰라서 뉴스를 피하는 사람의 수가 갈수록 늘어난다. 우리의 조상은 지나치게 ‘예’를 쫓다가 세월을 그르쳤다. 지금 우리는 너무도 무례無禮하고 무도無道하다. 이러고도 우리가 문명 세계를 말할 수 있는가. ‘극기복례’란 옛말에서 내가 향수를 느끼게 될 줄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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