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복소에 깃들기 보다는
거칠고 황량한 현실에
스스로의 집을 짓는 것이
봄을 부르는 지혜로운 길이다

 

   
▲ 권혁찬 전 회장
평택문인협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삼라만상은 일정한 환생의 주기가 있다. 몇천 년을 두고 변화해 가는 산과 바위 등 거대한 사물들이 있는가 하면 장구한 세월 동안 변하지 않는 하늘이나 땅, 바다 등도 자세히 바라보면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생물들이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환생을 거듭하고 있다.

풍화작용에 의해 분해된 바위가 모래가 되고 흙이 되었다. 그 위에 풀이 돋고 번성하게 되면서 동물의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영양분과 생장 요소를 공급한다. 지금 이 순간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이 자연의 실체가 아주 오랜 시간과 풍우의 세월을 보내면서 만들어 진 것이지만, 더러는 너무 쉽고 중대하지 않은 듯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좀 더 자세히 흙 속을 들여다보면 그 속엔 생명의 씨앗이 있다. 바로 식물의 씨앗이다. 세상에 뿌리내려 천덕스럽던 잡초들이 사람들에 의해 하나둘씩 작물로 변해 갔고 지금 우린 그 작물들을 재배하면서 잡초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다시 말해 내가 심고 가꾼 식물은 잡초가 아니고 그 이외의 풀은 모두 잡초다. 그런데 그 잡초의 번식력이나 성장력을 보면 가꾸지 않아도 번져나감이 경이로울 만큼 강하다.

어쩌면 우리가 늘 가꾸고 보살피는 농작물이나 관상식물, 정원수들보다도 월등한 생식 능력과 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잡초다. 인류에게 유익한 도움을 주는 식물들의 특성보다 더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하는 잡초의 비결이 무엇인가 궁금해진다. 잡초의 장점만을 살려서 재배하고 있는 식물이 작물이지만, 그 능력을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뭇 아리송하다. 아마도 잡초의 자생능력을 빼앗아 인류에 필요한 극히 일부분만을 편취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이기주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거기서부터 생산된 것들이 양식이 되었고 우리가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영양을 공급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잡초의 번식 능력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정성이 부족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농작물이 쉽사리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게 관리하고, 여타 잡초와의 경쟁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도록 돕는다. 농작물은 그런 까닭으로 인류에 필요한 양식과 영양을 공급하며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잡초보다 못한 농작물의 생식 능력이 곧 사람의 지극한 관심 때문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상대적으로 잡초들의 번식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직접적인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뽑아도, 뽑아도 한없이 자라나는 잡초의 근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부모의 사랑으로 세상에 태어나 지극한 정성을 다 받고 자랐다. 어쩌면 작물들처럼 우리 인간들도 자생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다. 우린 지나친 디지털 문명 속에 뿌리를 옮겨 박고 살아가고 있다. 척박하지도 가물지도 않은 풍요 속에 살면서 어느새 잡초의 자생본능을 잊은 것 같기도 하다. 식물은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다시 환생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도 그 본성을 잊지 말고 환생할 수 있는 근성을 간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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