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단상 斷想

 

문화예술 불모지 
쑥고개의 오명을 벗자

 

▲ 이수연 첫 사진 개인전 팸플릿(1980년). 지금 생각하면 형편없는 사진들이지만 이 전시를 계기로 내가 있을 수 있었고 송탄 사진이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 이수연
한국사진작가협회
전 부이사장

■ 첫 개인전, 송탄사우회 창립,  90명이 넘는 회원 기록

내가 송탄에서 세운 ‘첫 번째’ 기록이 몇 개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을 듯 하지만 내게는 꽤 중요한 기록이다. 

송탄 평택을 통틀어 첫 사진 개인전을 했다. 송탄에서 첫 사진동아리를 결성했고, 대한민국 사진전람회(사진 국전) 첫 수상, 한국사진작가협회 첫 입회, 국제사진공모전(동아국제사진살롱) 첫 입상, 그리고 송탄예총 첫 사무국장이다.

1980년 12월 20일. 교통대 앞 ‘영다실’에서 연 첫 개인전은 55점이라는 꽤 많은 작품을 걸었다. 지금도 쉽지 않은 작품 수다. 더구나 제대로 된 전시장도 아닌 영업 중의 다방 벽에 창고형 할인매장 전시품처럼 걸어야 했을 때니 말이다.

다방 전시는 전시실 자체가 없던 지방 소도시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래도 아는 분이 주인인지라 쉽게 빌릴 수 있었는데 그 전시는 1983년에 송탄 첫 사진동아리인 송탄사우회 창립으로 이어졌다. 

송탄사우회 창립에는 이면 스토리가 있다. 

첫 전시 포스터를 붙이기 위해 평택역 앞 어느 스튜디오를 찾았을 때 뵌 분이 전시를 본 훗날, 수원에 있던 사진동아리 ‘볕 모임’에 나를 추천해서 활동한 게 계기였다. 그때 추천한 분이 지난 정부 마지막 법제처장의 선친인 이은학 선생이다.

그 동아리 활동에서 느낀 게 있어서 송탄에도 도입했다. 사진 DP점 김성배 사장, 미국 대학의 한국분교 강사를 역임한 김정식 교수, 성모의원 최규웅 원장, 취미로 사진 활동하던 중학교 김성용 선배 그리고 이름도 얼굴도 희미한 두 분 최대기, 임태근 그리고 나. 이렇게 일곱 명이 송탄 구 터미널 위쪽에 있던 성모의원 3층에 모여 발기인 회의를 열었다. 1983년 4월 9일이다.

명단과 일자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그때 작성한 회의록 수첩이 남아 있어서다. 40년 된 수첩이지만 초창기 몇 달의 생생한 기록을 담았다. 

송탄사우회 결성은 속전속결로 진행했다. 시내에 포스터를 붙이고 수원의 이종원 선생과 평택의 이은학 선생을 무료 강사로 섭외해서 시민과 회원 대상 강좌를 열었고, 신문에 회원모집 전단을 넣어서 뿌렸다. 그렇게 해서 기록에 남아 있는 회원 명단만 62명이고, 기억 속 회원 수는 90명이 넘었다. 인구 10만 겨우 넘은 작은 도시에서 짧은 기간에 그토록 많은 회원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신 카메라 있잖아~ 들어와” 라며 서로서로 권유했기 때문이다. 미군 기지촌 쑥고개의 특성이 여지없이 발휘된 것이다.

1983년 5월 28일 토요일 저녁 7시. 송탄중앙라이온스클럽 사무실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내가 첫 회장을 맡았다. 이어서 6월 12일 일요일 비 내리는 날 병점 용주사로 첫 출사를 나갔다. 

▲ 쑥고개 교통대 앞 영다실에서 연 개인전 개전식 날. 내빈으로 참석한 송탄읍장과 함께(1980년 12월).
▲ 송탄 첫 사진동아리인 송탄사우회 창립 초기의 과정을 기록한 수첩과 첫 발기인 모임을 기록한 페이지(1983년 작성).
▲ 송탄사우회 초기 회원 명부. 기록에는 62명, 기억에는 90명이 넘었다(1983년 자료).
▲ 송탄사우회 월례회의(송탄중앙라이온스클럽 사무실, 1983년 5월)
▲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진행한 첫 출사. 병점 용주사(1983년).

 

■ 평택 사진계에 일으킨 나비효과

송탄사우회는 단순한 동아리 창립 같아도 평택에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송탄포토클럽, 영상둥우리클럽, 사계절, 무지개사진클럽, 불영회 등의 동아리가 생겼고, 회원 동기부여를 위해 공모전 출품을 권유한 게 사진작가협회 송탄지부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게 다시 송탄예총으로 이어졌다. 

소정의 자격을 획득한 3인(이수연, 최왕호, 정영준)이 1985년에 한국사진작가협회 경기지부(현 수원지부) 소속으로 처음 입회하면서 1988년 4월에 송탄지부를 인준 받아 독립해 나왔다. 성남지부와 함께 경기도 다섯 번째 지부 창립이었다.

현재 평택 사진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치른 건 1990년에 개최한 ‘신형상전국사진공모전’부터다. 고교 후배이던 송탄시 문화예술공보 담당 계장이 50~100만원 정도의 예산을 책정해 줄 수 있다고 귀띔해주었으나 그 예산이 너무 적어 수원 내무부 연수원 교수로 있던 지인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그를 통해 당시 송탄시 부시장, 경기도 회계 담당자와 밀당으로 700만원의 송탄시 예산을 확보했다. 지자체가 생기기 전, 모든 예산을 경기도에서 승인받아야 하던 때의 이야기다.

그렇게 시작한 전국공모전은 첫해부터 심사위원을 1년 전에 발표해서 심사의 투명성을 천명하고, 그 위원을 3~5년간 연임하여 선정 작품의 일관성을 유지했다. 2회 때부터는 새로운 형상성을 의미하는 ‘신형상’을 공모전 타이틀로 정해 전국에 사진의 방향성을 제시한 첫 공모전으로 출발했다. 그 이면에는 한국사진작가협회 25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우리나라 공모전에 대한 인식’이라는 설문 조사가 있었다.

‘송탄사우회’로 만난 최규웅 원장과 김정식 교수 그리고 나 이렇게 3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89년 송탄 국악협회와 1992년 송탄 문인협회 결성을 끌어내 3개 단체 준회원 조건으로 송탄 예총을 창립하게 된다. 그때 무보수 첫 사무국장직을 떠맡듯 맡았다가 공식적으로 송탄시의 예산이 책정되자 후임은 전임 사무국장 체계로 바뀌었다. 

이 제도권 예술단체는 1995년에 있은 송탄시·평택시·평택군 등 3개 시·군 통합으로 평택의 미술협회·연예협회·음악협회 등과 3대 3 통합 평택예총이 되었고, 이계송 초대 회장 체제로 출범했다. 

여기까지 들으면 송탄 예술의 출발과 진행이 아주 순조로웠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안에 남은 것들은 예술세계라고 다르지 않고 일상에서 만나는 많은 풍파와 어려움이다.

그런 굴곡을 이겨 낸 것은 ‘미군 기지촌 쑥고개’ ‘문화예술의 불모지 쑥고개’라는 자조自嘲와 오명에서 벗어나고 싶은 한 가지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정식, 최규웅 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보고 싶다.

▲ 송탄사우회 출사 기념사진(용주사, 1983~1984년)
▲ ‘신형상전국사진공모전’ 공개 심사 장면(왼쪽, 송탄문예회관 로비, 1990년대 초)과 시상식(송탄문예회관, 1996년) 신형상공모전은 2019년 제30회를 마지막으로 끝냈다. 사진 창작 환경이 30년 전과 많이 달라져 공모전의 역할이 축소된 데 따른 것이다. 전국에 300개가 넘는 공모전 시대에 스스로 막을 내린 건 평택이 최초이다. 대신 ‘평택국제사진축전’과 ‘바깥 사진전’으로 또 한 번 국내 사진계에 바람을 일으켰다.
▲ ‘동아일보 국제사진살롱’ 송탄순회전 (사진 왼쪽, 1998년 송탄문예회관)과 전시 안내 현수막(사진 오른쪽, 1995년). 주로 우리나라 대도시 위주로 순회 전시하던 국내 최대 최고 규모의 동아일보 국제사진공모전을 송탄에 유치했다. 필자가 1991년 그 공모전에 은상으로 입상하면서 동우회원이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끈질기게 유치작업 한 끝에 이룬 결과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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