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심창 의사 기념관이 건립되고
기탁된 유품들이 시민들과 함께
공유되길 기대한다

성주현 소장평택박물관연구소
성주현 소장평택박물관연구소

‘육삼정의거’ 90주년을 맞아 지난 3월 17일 원심창 의사 유품 기탁식이 있었다. 1906년 평택 팽성에서 태어난 원심창 의사는 1923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나키즘을 수용했으며, 박열과 함께 흑우회, 동흥노동조합東興勞動組合, 흑풍회黑風會,  흑우연맹黑友聯盟 등 무정부주의 단체에 참여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30년대 초반에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에 참여하여 의열투쟁에 적극 참여했다. 1932년 11월 톈진 일본영사관과 일본 병사 등에 폭탄을 투척했고, 이듬해인 1933년 3월 1일 항일선전문을 등사해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인에게 배포, 선전했다. 이어 3월 17일 백정기, 이강훈 등과 같이 아리요시 아키라 주중 일본공사를 폭살시킬 목적으로 중국 상하이 공동조계 우창로에 있는 육삼정六三亭 부근의 중국요리점 송강춘에서 통과를 기다리던 중 일본 첩자의 밀고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로 인해 원심창 의사는 나가사키 지방재판소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45년 해방을 맞아 출옥할 수 있었다. 그 공로를 인정해 정부에서는 1977년 독립장을 추서했다.

해방 후에는 이본에서 재일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을 창설하고 단장을 지냈으며, 해외에서 최초로 통일운동을 주도했다. 이처럼 일생을 일본과 중국 등 국외에서 민족운동과 통일운동을 전개한 원심창 의사는 1971년 일본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동안 국내뿐만 아니라 평택에서도 원심창 의사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다행히 유족과 뜻있는 지역 유지들이 ‘원심창의사기념사업회’를 조직해 육삼정의거 기념식을 비롯해 관련 학술 발표, 평전 발간 등 선양사업을 꾸준히 진행해오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원심창 의사 유품이 평택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들 유품은 일본에서 발행되는 <통일일보>가 소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원심창 의사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다. 특히 해방 후 일본에서 활동한 원심창 의사의 병상일기, 자필 편지 등 개인 자료, 재일한인사회 활동과 통일운동을 밝히는데 자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평가된다. 또한 그동안 확인되지 않았던 독립노동당의 당규, 당기, 관련 인물 등은 처음으로 공개되는 자료라는 점에서 정당사에서도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기탁된 자료는 원심창 의사 생애사를 포함해 재일한인사, 정당사, 통일운동사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보다 활성화하는 데도 사료적 가치가 크다.

선양사업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선양할 인물을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공간이다. 이를 위해 선양 인물을 조명하고 기억할 공간으로서 기념관을 건립한다. 기념관은 단순히 유품 등을 전시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시민과 공유하고 소통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평택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능을 아울러 갖고 있다. 

평택에는 역사적 인물을 선양하는 기념관이 전무한 실정이다. 선양 인물 발굴에 지자체 등에서 무관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더 늦기 전에 원심창 의사 기념관이 건립되고, 이번에 기탁된 유품들이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고 소통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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