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고통과 난관에 부딪쳐도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정재우 대표가족행복학교
정재우 대표
가족행복학교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의 마지막 장 ‘시작과 끝, 도쿄 1989년’을 다 읽었다. 왠지 모를 눈물이 앞을 가렸다. 선자가 남편 이삭의 무덤을 찾아가 아들 노아를 그리워하며, 가지고 온 두 아들 노아와 모자수의 사진이 달린 열쇠고리를 땅에 묻는 장면에 목이 메었다. 긴 가족의 역사가 그렇게 마무리됐다.

소설의 중심인물인 비련의 여인 선자와 그녀의 어머니 양진, 선자의 첫사랑이자 평생 가슴의 연인으로 품고 살아야 했던 한수, 훗날 일본 오사카를 주름잡는 야쿠자 보스인 한수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노아, 사생아가 될 뻔했던 아들 노아를 받아주고 선자 자신을 아내로 맞이한 목사 이삭, 이삭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 모자수, 모자수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일찍 사회로 나와 파친코 직장에서 일하게 되고, 노아는 와세다 대학을 다니다 중단하고 자기 신분을 감추고 일본인으로 살면서 파친코 직장을 다닌다. 모자수는 아들 솔로몬을 얻게 되고 솔로몬은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연인과 이별 후 결국은 아버지의 파친코에서 일하게 된다.

파친코는 재일교포가 이국땅에서 부를 이룰 수 있는 최상의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의 눈에는 경멸과 차별을 상징하는 소설적 메타포이다. 파친코로 성공하고 경제적 부요를 누려도 인종차별의 벽을 깰 수 없는 일본사회를 헤쳐 나가는 재일교포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폐부 깊게 전해져 왔다. 

<파친코>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건너가 가난과 차별을 겪으며 오로지 자녀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던 1세대와 2세대, 그리고 전후 일본의 경제 회복과 성장기에 적응하며 갖은 수모 속에 생존과 성공에 몰두하던 3세대, 정체성 혼란 속에서 여전히 신분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며 자신을 파친코 뒤로 숨겨야 하는 4세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파친코>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환기시켜 주기도 하지만 얄팍한 인종차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본의 편협한 의식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가족사의 삶을 파친코에 빗대어 제시하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뜻밖의 횡재를 할 수도, 일시에 파멸할 수도 있지만, 이것이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재일교포는 자신들의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 도박 같은 삶을 살아간다. 우리의 삶도 결코 그들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내일을 예측하기 어려운 현실을 살아간다. 하지만 <파친코>의 가족사가 보여주듯이 어떤 고통과 난관에 부딪쳐도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크리스천 문학의 가능성을 확장시킨 작가의 열정과 지구력 앞에 숙연함을 느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 이름을 사용한 담대함과 병약했지만, 겸손과 온유함으로 미혼모 선자를 아내로 맞아 일본으로 건너가 일가를 이룬 이삭, 그는 가족사 중심에 신앙과 조선인 정체성을 이어가게 한 장본인이기에 목회자에게 던져주는 무언의 의미와 도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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