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익은 결과적으로
국민의 이익으로
대변되어야 한다

공일영 소장청소년역사문화연구소
공일영 소장
청소년역사문화연구소

정치권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표현이 “국익을 위한 것입니다”일 것이다. 여기서 국익이란 과연 무엇일까? 한자어로 표현한다면 ‘국가의 이익’ 정도일 것이지만, 가볍게 생각할 부분은 분명 아니다. 국익을 ‘국가의 이익’으로 설명하려면 국가는 곧 국민임을 명심해야 한다.

플라톤은 <국가>라는 글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젊었을 때 나의 경험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성인이 되면 즉시 공공생활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치 상황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여 이 계획에서 나를 이탈시켰다. 그때 민주정치는 혐오를 받고 있었으며 혁명이 일어났다. 나는 어떤 도시나 예외 없이 모두 부당한 통치를 받으며 그들의 입법상태는 모두 다 한심스럽기 때문에 어떠한 행운이 결합된 철저한 재건이 없이는 어떠한 정부도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나는 참된 철학을 칭송했고, 단지 그것을 통해서만 국가와 개인 양자를 위한 실제적인 정의가 발견될 수 있고 실시될 수 있다고 외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말했다. 인류는 참된 철학자가 정치적 통제력을 장악하든가, 어떤 기적을 통해서 정치가들이 참된 철학자가 되지 않는 한 재앙에서 떠나지 못할 것이다”

과연 지금의 대한민국은 참된 철학자가 정치적 통제력을 장악하고 있는가? 아니면 기적이 일어나 정치가들이 참된 철학자가 되어가고 있는가? 정치권에 질문하고 싶다. 당신들은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과연 국민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국가를 이루는 구성원들을 일부 특정 국민으로 한정하고 있지는 않은가?

토마스 홉스의 저서 <리바이어던>은 사회계약설로 이어지는 국가의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다. 원시사회에서는 끊임없는 전쟁과 살육이 벌어졌으나, 이 결과가 공멸임을 인지한 사람들이 서로 간의 투쟁을 종식하고 한 명의 주권자에게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기로 서로 간의 암묵적 계약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암묵적 계약이 ‘국가’가 탄생한 배경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특정 세력의 이익을 위해 대다수 국민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정책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최근 국제관계를 살펴보면 신냉전 시대로 회귀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탈냉전 시대를 벗어나 새로운 국제사회에서의 강자로 성장한 대한민국이 주변국들 사이에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며 실익을 얻지 못하는 외교 정책에 대한 안타까움이 크다.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국익이요, 국익은 결과적으로 국민의 이익으로 대변되어야 한다.

미국, 일본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현실적인 상황에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 시급한 것도 사실이다. 중국은 세계 최대의 경제시장이므로 중국과의 관계 악화는 우리의 경제 상황에 절대적으로 손해이며, 이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100년 전 일로 일본을 무릎 꿇게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양안관계에 대해 우리가 관여하지 말고, 실익을 챙겼으면 한다. 그것이 진정한 국익을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100년 전 대한제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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