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은 온 마음을 모아서
돌미륵입상을 원위치에
보존하기를 희망한다

윤시관 상임대표​​​​​​​​​​​​​​문화재지키기시민연대
윤시관 상임대표
​​​​​​​​​​​​​​문화재지키기시민연대

고구려 때부터 있어 왔던 마을 소사동. 그곳엔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가 있어서 청동기 유적 공원이 있고, 고려 때는 사찰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소사원’이라는 주막이 있어서 관리들이 숙식을 하며 지방순시를 할 수 있었고, 일반백성도 묵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소사원 앞에는 동네 주민의 안녕과 만복을 기원하는 ‘돌미륵입상’이 있어서 삼남대로를 오가는 여행객도 함께 그 앞에서 마음을 모아 기원하곤 했다. 비바람에 오랜 세월 마모돼서 형태는 윤곽만 남은 상태이지만, 오랜 세월 민초에게는 의지의 대상이었다.

필자가 어렸을 때는 300년도 넘은 당산목인 참나무가 울창한 가지로 하늘을 가리고, 그 옆 당집에 백마의 그림이 벽에 붙어 있었다. 매년 음력 설을 쇠고 보름이 되기 전쯤에는 대동제를 지냈다. 당집과 돌미륵, 온 동네 사람이 식수로 사용하던 공동우물 세 곳을 이어주는 붉은 황토 무더기를 한 삽씩 놓아서 길을 가다가도 밟을세라 조심히 걸어야 했다. 대동제가 끝나면 굵은 동아줄을 꼬아 만들어 동네 길 가운데에서 동서로 두 패가 나뉘어 줄다리기했다. 승자가 사는 곳이 어느 쪽인가에 따라서 풍년이 될 것인지, 흉년이 될 것인지 예측하기도 했고, 줄다리기에 쓰였던 동아줄은 당산목에 칭칭 감았다가 이듬해 제사 때 사용한 소지와 함께 태웠다.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로 가는 조선시대 국도 1호선 삼남대로는 그 시대 과거 길을 오가는 선비와 장삿길 오가는 상인, 친척 집을 방문하는 행인 그리고 관리의 지방순시로 항상 붐볐고 어쩌다 임금님이 온양으로 행차할 때면 이곳 소사원 앞에 어막대를 설치해 놓고 쉬면서 어찬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사동에는 장이 섰었다. 평택 서부역인 원평동에 평택오일장이 있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평택에 경부선 철도역이 생기기 전인 1920년경까지 소새장이 오일에 한 번씩 있어서 농기구를 만들어 파는 대장간, 엿 공장, 떡 방앗간, 포목점이 있어서 각종 생활용품을 사고팔았다. 그래서 소사원 주막 앞에 있던 돌미륵입상은 많은 사람에게 무병장수와 소원을 비는 미륵신앙의 중요 대상이었을 것이다.

돌미륵입상은 소사동 산 토지주가 안중읍 정토사로 옮기기 전까지 마을의 수호신이며, 평택시 향토문화재로의 가치를 갖고 있었다. 그 전에 소사원터에 새로 집을 짓고 살아온 이 모 씨가 통장, 주민과 함께 돈을 들여 돌미륵상의 집을 새로 짓고 아침, 저녁으로 촛불을 밝히고 정화수를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 씨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관리가 소홀해졌다. 돌미륵입상이 정토사로 옮겨진 후 지난 5월 경기도문화재로 지정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실이 최근 보도돼 관심을 끌기도 했다. 더욱이 미지정 사유 중 하나로 원래 있던 곳에서 옮겨 왔다는 점이 꼽힌 것으로 드러났다.

향토문화재가 제 자리를 떠나서 있는 것은 그 가치를 상실해야 마땅하고, 평택시민 공동의 유산을 사찰로 옮겨 문화재로 등록하고자 한 것은 참으로 어이가 없다. ‘평택 소사역사문화마을’ 조성을 위해 힘을 모으고 있는 시민들은 온 마음을 모아서 돌미륵입상을 원위치에 보존하기를 희망한다. 옛 모습대로 소사원 주막과 어막대, 소새장터를 복원하고 소사마을에 많은 방문객이 찾아오길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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