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해질 수도
뻔뻔한 세상을 감당할 수도 없기에
‘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이 절실하다

임윤경 대표평택평화센터
임윤경 대표
평택평화센터

정신없던 어느 날, 우리 단체가 ○○○○대상에 추천됐다는 전화를 받았다. 지난해 연말, 동료 두 명과 함께 ‘미군 사건사고 피해주민 법제도 개선 연구보고서’를 냈는데 그 보고서를 감수한 교수님이 추천해주셨던 모양이다. 관련 서류를 보내달라는 내용과 함께 상금이 2000만원이라는 사실이 덧붙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서 있었다. 하지만 당황스러움도 잠시, 이 내용을 운영위원회 대화방에 공유하면서 갑론을박이 시작됐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 단체 이사장이 경질되고 친이명박계 인사가 이사장이 됐다. “그 상을 받으면 현 정부와 동조하는 것이다” “누가 판단하고 누가 주는지 보고 판단하자” “우리가 먼저 달란 것도 아니고 그들이 준다는데 그냥 받으면 된다” “인건비도 없이 허덕이는데 좋은 기회다” 등등 논쟁이 이어졌다. 

‘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이란 단어가 있다. 한국사회에서 이 말은 도덕적 올바름, 정치적 정당성 등으로 번역되어 왔다. 권력자나 여당의 부패와 비도덕보다 야당이나 진보 진영의 부패 사례가 더 비판받는 것은 정치적 올바름이 도덕적 올바름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우리 단체는 진보를 자칭하든, 진보로 간주되든, 진보 진영에 속해 있으므로 우리의 정치적 올바름은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상을 받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 받아도 된다는 의견은 누가 ‘진정한’ 진보이고 보수인가, 이들 중 누가 더 도덕적인지를 평가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는 의견이다. 오히려 상을 받지 않음으로 “나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나는 헌신했다” “나는 옳다”라는 태도와 독선이 우리를 망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왜 그리 진보 세력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은가. 사회적 대안 마련은 공동체 모두의 몫이다. 진보는 싹수만 있어도 충분하다. 그래서 받아도 무방하다는 주장이다. 이런 논쟁 속에서 우리는 무슨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간다.

얼마 전, 집권여당은 청년들이 실업급여로 명품을 산다며 여성, 청년, 실직자를 폄하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순방 중 김건희 여사의 ‘명품 편집숍’ 쇼핑에는 정작 침묵한다. 국민 세금 10억 원을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결정을 홍보하는 광고 집행을 위해 썼다. 대통령의 처가 땅 특혜를 위해 고속도로 노선 변경 논란이 되자 수년간의 국책사업을 ‘백지화’해 버렸다. 윤석열 정부 출범 1년 만에 미국 무기만 약 18조 원어치 구매, 전 정부 임기 5년보다 7배 이상 많이 썼다. 사회 돌봄 사회보장 서비스를 시장화, 민영화 정책을 추진하겠다 밝혔다. 이들은 지금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 ‘나만 옳다’는 독선적인 태도, 상대 진영을 가르치려 들고, 합리적 비판에 대해 조롱하고 희화화하며, 내 편과 네 편을 명확하게 가르고 적으로 간주하는 태도, 현 정부의 모습이다. 이러다 나라 전체 시스템을 붕괴시키지 않을까 두려움이 앞선다. 

‘개인이 버는 소득의 90퍼센트는 사회 공동체의 공동 자산 덕분’이라고 했다. 옳고 그름을 고민하는 소박한 시민들은 이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처럼 뻔뻔해질 수도, 뻔뻔한 세상을 감당할 수도 없다. ‘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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