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재난 앞에서 시급한 일은
생명 감수성을 깨우는 일이다

정재우 대표​​​​​​​​​​​​​​가족행복학교
정재우 대표
가족행복학교

물 폭탄이 또 떨어졌다. 해마다 반복되는 우기가 찾아왔다. 장마가 올 것이란걸 알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그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현상도 기후 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우리의 생각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작은 바이러스로 인해 숱한 생명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져가는 광경을 목도했다. 시신을 묻을 곳이 마땅치 않아 긴 도랑을 파고 집단 매장을 하는 나라의 뉴스도 보았다.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미약한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도 처참한 뉴스가 줄을 이어 일어났다. 

이제 그 악몽 같은 시기가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위기 상황은 그칠 줄 모른다. 기후 위기, 환경 파괴, 오염수 방류, 전쟁, 난민, 기아, 모두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생명 감수성의 문제다. 동물계 생명 보존을 위해 희귀종 보호와 방류를 한다. 식물계도 사라져가는 야생화 보호와 보급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런데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감수성은 갈수록 희박해져 간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기기가 인간을 대체하고 인간은 잉여인간으로 추락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부실 건축물이 무너져 사람이 매몰되어도 잠시 떠들 뿐 생명 감수성은 작동하지 않는다. 물 폭탄이 쏟아져 산사태와 지하차도에 갇혀 생때같은 생명이 처참히 스러져도 생명 감수성이 별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해가 바뀌어 또 장마가 오면 동일한 사고가 연이어 일어난다. 세월호 사고에서 어린 생명들이 안타깝게 떼죽음을 당했다. 이때만 해도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전 국민적으로 일어난 줄 알았으나 이태원 골목에서 상상하기도 고통스러운 사고로 젊은 생명들이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생명의 감수성이 이렇게도 무디어졌던가 탄식이 나올 뿐이다.

김균진 전 연세대학교 교수는 자신의 저서 <생태학의 위기와 신학>에서 일찌감치 이를 지적했다. 그는 인간을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 보는 근대 사상에 의해 인간 생명에 대한 시각도 변질했다고 한다. 그 중심에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지동설이 있다. 다윈의 진화론과 프로이트의 심층심리학과 초기 마르크스의 자연주의 인간학을 지적했다.

인간은 자연 없이 창조되지는 않았으나 자연과 연결해 자연과 함께 창조됐기에 창조의 공동체에 속하는 한 지체로 본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특별한 존재다. 우주에 있어 인간의 특별한 위치란 자연의 지배자나 정복자가 아니라 가꾸고 돌보아야 할 청지기로서 책임적 존재이다. 그래서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한 온갖 노력은 인간의 몫이다. 이런 의미로서 인간의 존재와 생명의 가치는 특별하다. 과연 이런 새로운 인간성으로 우리는 거듭났는가?

2022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제27차 기후 당사국 총회 개회 연설에서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우 구테호스는 “인류가 기후 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 우리가 기후 연대 협약을 체결하거나 집단 자살 협약을 체결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세계적 재난 앞에 서 있는 우리는 집단 자살을 선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시급한 일이 바로 생명 감수성을 깨우는 일이다.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