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되는 역사의 반복은
만들지 말아야 한다

성주현 소장평택박물관연구소
성주현 소장
평택박물관연구소

오늘날 현실의 역사는 연구자의 주관적 해석을 중요시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 해석은 시대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지나치면 자신도 모르게 역사를 재단하게 된다. 나아가 역사를 이데올로기의 제물로 삼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필요하다.

요즘 한국 사회에 가장 화재話材가 되는 인물은 다름 아닌 홍범도이다. 얼마 전 국방부는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있는 홍범도 흉상을 철거한다고 발표했다. 

홍범도는 누구인가. 우리 근대사에 조금만 관심을 가졌다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인물이다. 홍범도는 일제 침략기인 1907년부터 산포수 의병부대를 조직해 후치령전투, 갑산읍 점령 등을 비롯해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했다. 그때 붙여진 별명이 ‘나는 호랑이飛虎’였다. 1913년 노령 연해주에서 노동회를 조직했고, 3·1운동 직후 가장 먼저 대한독립군을 조직해 최초의 국내 진공 작전에서 승전했다. 1920년 6월 이를 보복하기 위해 출병한 일본군을 격파하고 대승한 봉오동전투의 주역이다. 이어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함께 대승을 거뒀다.

일제의 독립군 토벌과 만주 군벌의 충돌로 인해 홍범도를 포함한 독립군 세력은 소련 영내로 탈출했다. 홍범도는 레닌과 트로츠키를 독대했으며, 마우저 권총을 선물로 받을 정도로 소련 한국계의 거물로 성장한다. 그러나 독립군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시참변을 겪는다. 더욱이 일제의 간섭으로 독립군은 해산된다. 홍범도는 한인 콜호스의 지도자를 지내다가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다. 그렇지만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이뤄진 고려인 강제 이주정책으로 인해 당시 소련 영토였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이주 한인사회를 지도하다가 해방 직전인 1942년 삶을 마감했다. 2021년 마침내 한국으로 봉환됐고, 국립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국방부는 홍범도 흉상을 철거하는 이유를, 그가 레닌을 만나고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홍범도가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이유는 조선의 독립이었다. 독립 투쟁을 위한 그의 선택을, 이념 대립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있다. 일제 강점으로부터 독립한 현실에서 당시의 이념을 논한다는 것은 진부한 역사 논쟁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이유는 자유시참변 당시 홍범도가 독립군을 몰살하는 데 가담했다는 것인데, 이 역시 역사학자에 의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윤상원 교수는 “홍 장군의 부대가 자유시참변에 가담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고, 오히려 참변 당시 홍 장군이 휘하 장교들과 인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는 증언만 있다”고 밝혔다.

역사 논쟁은 자신의 입맛에 맞게 역사를 재단裁斷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홍범도 흉상 철거 역시 그들만의 이념에서 비롯됐다. 시대적 상황을 배제하고 단편적으로 역사를 재단할 수는 없다. 자신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리그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역사는 만인이 공감할 때 올바른 역사가 된다. 만인이 원하지 않는 역사는 언젠가는 다시 재단될 수밖에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재단되는 역사의 반복은 만들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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