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깊고 고요하게 넘어가는지
아직 한창인 밤의 라이더들이
삶과 팽팽하게 은유하며 날아간다

유영희 시인
유영희 시인

반달이 떴다. 엷고 부드러운 노란 그라데이션gradation이 고운 상현달이다. 흰 구름은 파란 하늘을 둥실 떠갈 때 예쁘고, 코발트 블루색 어둠을 빛나게 밝히는 것은 달과 별 은하수 무리다.

밤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드물어졌다. 일과를 마치고 우연히 고개를 들었을 때 턱선을 간질이며 지나는 바람이 우주를 열어주듯 선선하다. 마침, 침침해진 눈으로 <나는 루소를 읽는다>를 읽고 있는데 오늘 밤 달을 보니 무언가 쾌청하게 반짝이는 기분이 든다.

“그는 움직이는 하늘에만, 빛을 주는 별에만, 나 자신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풀을 뜯는 염소에도, 하늘을 나는 새에도, 떨어져 굴러다니는 뜰에도, 바람에 날리는 잎사귀에도 그는 존재하고 있다”

범우주적 종교관을 가진 루소는 이같이 그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그(신)’란 존재를 부드럽고 순수한 심오한 지혜자라고 말했다. 이런 말들과 닿으면 노곤했던 일상도 정제되는 기분이다.

한가위, 가위, 중추, 중추가절, 가배라는 다양한 추석의 이름이 있다. 어린 시절과 사뭇 다른 풍경이지만 그 순수한 정서는 변하지 않아 내 가슴은 여전히 그 배경에 노닌다. 백과의 어원을 보자면 ‘추석秋夕은 가을의 달빛이 가장 좋은 밤, 달이 유난히 밝은 좋은 명절이라는 의미’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라는 속담도 그 으뜸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핵가족화 시대를 떠나 1인 가구 수가 750만 2350가구라고 한다. 주변에도 1~2인 가족이 다양한 나이층을 이뤄 살고 있다. 달을 보니 이번 추석에 온다는 두 아들과 며느리가 더욱 그립고 기다려진다. 보고 싶은 감정은 감춘다고 될 일이 아니어서 맘 놓고 그리워할 것이다. 아직 몇 날이 더 지나야 쟁반같이 둥근달도 뜰 텐데, 마음은 벌써 감주를 달이고, 고기를 재우고, 잘 익은 과일 준비에 바쁘다.

부엌은 경상도 방언으로 ‘정지’라고 부른다. 추석 전날 아궁이에 무쇠 솥뚜껑을 걸어 놓고 전 부치기가 한창이다. 무를 잘라 만든 손잡이로 기름을 두른다. 경상도 음식의 대표 전인 배추전을 시작으로 미나리전, 깻잎전, 정구지전, 무전, 고구마전을 비롯해 수수 소를 넣어 부친 수수부꾸미전이 크고 둥근 나무 채반에 가지런히 놓이면 그 또한 둥근 보름달이 된다. 고향에서는 전을 적이라고 불렀다. 놀다가 배가 꺼지면 한입 물고 또 한참을 놀다 들어오면 정지와 마당과 골목은 온통 고소한 기름 냄새로 가득하여 모처럼 배고픈 가난을 씻어 내렸다.

세월이 아무리 가고 변해도 이런 정겨운 풍속은 지속되기를 원한다. 이러한 경험들은 기억에서, 가슴에서 영원히 남아 쉽게 늙지 않는 사고의 유연성을 가지게 한다. 가난했지만 가족과 나누어 먹던 음식, 행복한 웃음이 사람살이의 다정한 표본이라 생각한다.

“인간의 행복은 외부로 향한 시선을 끊고 자신의 내부로 눈을 돌려 자기만의 세계에서 만족할 때 실현된다”고 생의 마지막 66세의 루소는 <고독한 산책자의 사념>에서 밝혔다.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달처럼 깊어지는 행복한 책이다.

책장을 넘기듯 달도 달빛 한 장 부리나보다. 어둠이 깊고 고요하게 넘어가는지 아직 한창인 밤의 라이더들이 삶과 팽팽하게 은유하며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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