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스 통장도 없던 때, 통장에는 ‘0원’이 찍힌 지 오래됐으나 돈 들어올 곳은 전혀 없던 빈한한 시절이 있었다. 쇼핑도 눈으로만 하고, 커피도 한 잔만 시켜서 나눠 먹던 때, 시장에서 천 원짜리 티셔츠를 사 입고, 논바닥에 앉아 새우깡 안주에 막걸리 한잔으로 인생을 논하던 때….

그때는 비록 돈은 없었으나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고 ‘여유’가 있었다. 싱그러운 봄을 느꼈고, 단풍과 낙엽을 보며 사색에 잠겼으며, 눈이 내리면 마냥 누군가가 그리워지던 감성이 있었다. 무작정 전화를 걸어도 반갑게 맞아주는 친구들이 있었고, 동네 놀이터 그네에 앉아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던 친근함이 있었다. 함께 별을 이야기하는 동안 잠깐의 울음과 긴 웃음이 있었다. 

지금은 고정적으로 월급을 받는 곳도 있고 그럴싸한 집도 마련했다. 마이너스 통장도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되고, 명품은 아니지만 마음만 먹으면 홈쇼핑에서 철 따라 옷을 사 입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은 예전보다 더 쓸쓸하고 가난해졌다. 내가 겪는 일련의 과정들은 어쩌면 부유하게 산다는 것을 ‘많은 돈’으로 인식하는 대다수 사람이 겪는 일일 것이다. 

자본주의와 부에 관해 연구했던 칼 막스는 ‘경제적 부’의 개념에 비해 ‘실질적인 부’란 필요노동시간, 즉 먹고사는 돈을 버는 데 사용하는 시간 이외의 가처분 시간이라고 정의했다. 즉, 돈 버는 데 사용하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진 사람이 ‘실질적인 부자’라는 뜻이다. 

막스의 정의대로라면 오로지 돈을 버는 일에만 매달리는 삶은 더없이 궁핍한 삶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의 돈을 받으려면 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해야만 하는데 그러려면 돈을 벌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결국 실질적인 부를 이룰 시간은 후순위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돈을 버는 일이란 대개 단조롭고 빈약하다. 그 일에 능숙해질수록 속도는 더 빨라지지만 그만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빠지기도 쉽다. 결국 돈을 벌기 위해 속도는 더 빠르게, 시간은 더 많이 할애하는 단조롭고 빈약한 삶에서 벗어날 길이 없게 된다. 

돈이 많은 부자들은 그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이 가진 시간의 상당 부분을 내어준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은행에서 계속 빚을 낸다. 빚이 돈을 벌고, 또 돈이 빚을 만드는 순환고리에 갇힌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모든 삶을 투자하고, 돈이 없다는 말을 되뇌며, 은행에서 계속 돈을 빌린다. 돈을 버는 일에 자신의 삶을 건 많은 사람이 부자들의 삶의 방식과 비슷하게 산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돈이 있다고 누군가를 선뜻 돕는 일도 별로 없다. 그들은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한다고, 항상 돈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더 벌어야 하고, 더 빌려야 하고, 그 일을 위해 잠자는 시간을 쪼개가며 하나뿐인 삶을 내던진다. 그것은 경제적인 부를 갖게 할지는 모르지만, 실질적인 부에서는 점점 더 멀어지는 절대빈곤의 경지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것이 나를 힘들게 할 것을 알면서도 모두가 하는 것이니 나만 안 하면 뒤처지는 것 같은, 그래서 기꺼이 동참하는 것이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다. 소비하는 방식도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에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는 것이 아닌, 남들 다 가는 명소를 돌아다니며 인증샷을 찍거나 명품을 소비하는 등의 뻔한 패턴을 이어간다. 

그러나 실질적인 부를 이루기 위해서는 단순한 소비나 소모의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로운 삶을 창조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런 능력은 하루아침에 얻어지지 않는다. 다른 능력들처럼 배워야 하고 몸에 배도록 노력해야 한다. 돈을 버는 능력만이 아니라 돈을 쓰는 능력도 배워야 한다. 돈을 버는 능력만 가진 부모는 자녀에게 돈을 쓰는 능력을 가르칠 수 없다. 돈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복이 되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도 하는데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돈의 노예가 되거나 혹은 돈의 위해를 받을 수도 있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서 정신의 발전과정을 낙타와 사자와 어린아이의 세 단계에 비유한다. 가장 낮은 단계에 있는 낙타는 의무와 책임의 단계, 권력과 권위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단계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처럼 그것이 자신의 숙명인 것처럼 체념하고 나아가는 삶, 자본주의에 길들어가는 우리는 어쩌면 이 낙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니체가 말한 가장 높은 단계의 ‘어린아이’처럼 자기 자신만의 삶을 창조하는 것, 자본주의에 굴하지 않고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나가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곧 실질적인 부를 축적하는 길이고, 우리 삶의 자유를 얻게 되는 시작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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