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을 채우지 않고 비우는
맑고 푸른 공명의 연습이
사람살이를 유지하고 이어주는
관계의 참답고 아름다운 일임을 자각하자

유영희 시인
유영희 시인

11월의 연서가 희미해질 시간이다. 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를 적시는 밤비가 내린다. 이 계절에 태어나 인생 중후반을 지나는 형부의 생신모임이 있었다. 아직 일을 놓지 않은 칠십 초중반 언니와 형부, 동생부부가 함께 모여 마음으로 축하하는 자리다.

통복시장에서 야채장사를 업으로 평생을 보낸 언니들이 구부정한 몸으로 입장한다. 다리는 절룩거려도 서로의 안부를 묻는 낯빛이 봄동같이 푸르다. 과일과 각종 채소를 파는 손등 거친 언니를 보면서 바람에 파인 노련한 생과 부딪혀 온 신선한 눈빛을 마주하는 기쁨이 크다.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듯 일곱 자매를 다 얘기할 수 없지만, 각자 세월에 맞는 무게로 살아가는 모습, 힘겨운 그림자 시간이 향기롭다. 세월을 이기는 장사 없듯 늘어진 팔자 주름처럼 주름진 세월을 견디며 무탈하게 사는 모습이 고맙고 그윽하다.

둘 또는 여러 대상이 서로 연결되어 얽혀 있음이 ‘관계’의 뜻이다. 가족이란 구성원이 뻗어나가 그립고 애틋하고 반가운 하모니를 이룬다. 친구 관계가 그러하고 살아가면서 맺게 되는 따스한 인연들이 그러하다. 다행히도 우리 자매들은 가까운 곳에 터를 이루고 살아 생일 모임과 여름휴가, 자녀들의 경조사에 참석하며 자주 보아 정이 더하다.

돌확에서 아들이 사다 준 로봇 피쉬 니모가 노닌다. 태엽을 감으면 헤엄치는 물고기가 귀엽다. 어린 날의 재미란 꽃말을 가진 풍선초처럼 각자의 생활권에서 씩씩하게 사는 두 아들이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더욱 그립다. 주말에 한 번 내려온다는 소리에 아들이 좋아하는 반찬을 만든다. 김장 김치와 돼지고기 주물럭, 수제 돈가스가 찬통에 그득하다. 얼마 전 어린 시절 생일상 앞에 친구들과 앉아 케익을 자르는 고깔 쓴 사진에 눈을 맞추며 ‘품 안 자식’인 날들을 회상해 본다. 아들도 멀리 타지역에서 사회인으로 직장에서 만난 인연들과 그리고 여자친구와 두런두런 시간을 엮으며 살아가겠지.

사람살이는 이런 그리움이 있어 마음이 꽃피워지는 것 같다. 회자정리會者定離나 이자정회離者定會와 같은 사자성어처럼 가족을 비롯해 모든 만남은 반드시 헤어짐이 있으니 그런 연유로 관계의 아름다움이 성립되는 것은 아닐까. 목소리를 들으면 상대방도 나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느낀다. 사랑의 온도가 보인다.

쇠하고 잠시 안거에 드는 계절의 기운 때문인지 가까운 지인의 부고 소식이 잦다. “수목은 뿌리만 남은 뒤에야 꽃과 잎사귀가 헛된 영화임을 알게 되고, 사람은 죽어서 관 뚜껑을 덮은 뒤에야 자녀와 부귀가 무익함을 알게 된다”는 말이 있다. 부모의 죽음으로 인해 후폭풍으로 닥친 가족 관계의 파괴를 여러 차례 보았다. 갑작스레 돌아가신 부모가 남긴 거액의 통장이 화근이었다. 형제자매가 하루아침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것이다.

물질은 인간성을 휘발하게 하는 강력한 인화력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사람다움을 보여 줄 때 건강하다. 유연하고 적정선에서 일보 양보하고 비켜설 줄 아는 배려가 필요하다. 채근담에서 어떤 대상에서 떠나 공간만 남게 하는 것이 ‘비우다’의 현언이다. 욕심을 채우지 않고 비우는 맑고 푸른 공명의 연습이 사람살이를 유지하고 이어주는 관계의 참답고 아름다운 일임을 자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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