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가을처럼 세월도 동면에 들어
문밖으로 세월이 가는 소리를 들으며
살짝 엎드려 봄소식에 귀를 기울여 본다

권혁찬 전 회장평택문인협회
권혁찬 전 회장
평택문인협회

바람이 씽씽 불기 시작했다. 세찬 바람을 없고 하얀 눈이 겹겹이 내려 쌓이고 있다. 이제야 겨울이 시작된 모양으로 제법 거센 추위와 찬바람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절기가 동지로 접어들고 있어 긴 겨울밤이 쥐꼬리만큼씩 짧아질 거란다. 할머니의 긴 이야기도 조금씩 짧아지면서 짧아지는 만큼씩 잠이 길어질 것 같지만, 아침을 맞는 어린아이의 눈가엔 여전히 잠이 부족한 채 눈언저리를 비벼 댈 것이다. 추위가 절정에 이르면 겨울도 절정에 와 있음을 의미 하듯 바람 소리 또한 거친 숨을 몰아쉬듯 우리의 옷깃을 습격하게 될 것이 분명하지만, 호호 불어 대는 사람의 입김을 이겨 내진 못할 것이다.

구수한 가을 동안 하나둘씩 내려놓던 낙엽들을 아직도 떨구지 못한 채 보듬고 서 있는 쓸쓸한 갈참나무 몇 그루가 한 겨울을 지키며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치 황혼의 노부를 연상해 본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의 절정에 선 저 나무의 귓전에는 꽤 많은 세월의 소리가 스쳐 지나갔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지난날 무수히 듣고 흘려버렸던 수많은 말들이 우수수 쏟아져 마치 겨울바람 소리인지 세월의 휘파람 소리인지 경계가 불명확함을 느끼기도 한다. 더구나 초라한 가지에 몰아붙인 눈보라가 만들어 낸 설빙 꽃은 옷을 입힌 것 인지 벗겨 나가고 있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워 판단이 모호하게 시선을 흩트리고 있어 세월의 나이를 불식시키고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선 밤 부엉이 소리 또한 새 소리인지 문풍지 소리인지 가늠하기 어렵고, 탁탁 바람에 나뭇가지 부딪치는 소리는 계절 잃은 딱따구리 절규인지 꿈결의 인기척인지 참으로 난해한 소리로 둔갑했다. 분명 세월 가는 소리였구나! 추운 겨울밤에 느껴지는 바람 소리에 온기를 불어 넣기란 그리 쉽지 않겠지만, 가슴까지 내려간 이불을 쓱 끌어올려 새벽 한기를 막아보듯 느슨했던 옷깃을 여미며 지난 계절 동안 챙기지 못했던 시절 인사들을 생각해 낸다.

눈 녹은 봄물이 졸졸 흘러내리던 날에는 꾀꼬리 종달새 소리가 한 옥타브 위의 소리를 내며 삼라만상의 시작을 알리듯 늦겨울 찬바람을 녹여 내면 우리의 마음은 노랑 분홍으로 물들어 저절로 흥얼거리던 꽃노래가 가슴에 물을 들였다. 봄이 오는 소리다.

세상이 온통 비에 젖어 한소끔 씻겨 나가고 나면 호락호락 하지 않은 여인네의 뒷모습처럼 청순한 싱그러움이 피어나면서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여름이다. 좀처럼 숙어들이지 않을 듯 내리쬐는 저 뙤약볕 아래 반짝이던 모래알들도 속이 타들어 가듯 갈증을 빌미로 물 한 모금을 갈구해 보지만 찝찔한 땀방울만 이마를 흐를 뿐 여름은 혹독한 인고의 한증막이다.

여름이 가고 울긋불긋 익어가는 밤송이가 연한 바람에도 툭 하고 떨어지면 한세월이 흘러감을 통감한다. 세상이 배가 부른 가을이라 몸과 마음이 풍요해 좀처럼 꺼지지 않을 것 같던 배 고래를 쓰다듬으며 포만을 느끼다 보면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는 언덕을 넘어서기 무섭게 된서리 찬바람 몰아치는 겨울로 접어들면서 감상의 소리조차 내기도 전에 공기가 얼어붙기 시작하면 드디어 겨울이다. 호시절 경관이 다하고 나면 인생의 가을처럼 세월도 동면에 들어 문밖으로 세월이 가는 소리를 들으며 살짝 엎드려 봄소식에 귀를 기울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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