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도 우리와 함께
자연 안에 거하는 생명이니
공생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유영희 시인
유영희 시인

음산한 겨울밤 하늘을 올려다보고 놀랐다. 동물과 곤충의 습격을 받는 재난영화를 보는듯한 광경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길고 짧은 전깃줄 서너 줄 층층이 빼곡하게 앉아 있는 검은 형체는 까마귀 떼가 분명했다. 겨울 철새인 까마귀 무리가 이동하면서 먹을거리가 많은 들판에 머물다 밤이면 시내 전깃줄을 숙박지로 정하는 것은 높은 아파트 건물이 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일 것이다.

한참을 서서 그들을 지켜본다. 날개를 푸덕이며 잠자리 서열을 정하는지 가지런히 순서대로 앉기도 하며 아직 대다수 무리는 허공을 돌며 기괴한 소리를 내어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고층 아파트 사는 어느 누구도 이 무례한 친구들을 향해 소음에 대한 한마디 항의도 하지 못한다. 아래위 층간소음으로 시비가 붙은 사람들도 말을 못 하니, 무리의 보이지 않는 검은 힘이 막강하다.

까마귀가 떠난 아침 출근길 새들이 남긴 테러의 흔적을 밟으며 걷는다. 찍 갈긴 배설물 세례를 맞은 길가 자동차와 도로는 물론이고 소나무와 각종 시설물은 불결함을 견뎌야 했다. 어느 곳은 이른 시간 단체에서 물청소를 했지만 비릿하고 시큼한 냄새는 여전히 불쾌했다.

이런 상황을 보면 드는 생각이 있다. 요즘 사람들은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아주 조그만 일에도 큰 시비가 붙는다. 그 시비로 목적이 있는 사과를 받아내려 하고 돈을 뜯어내는 빌미로 만든다. 무엇이 ‘화’로 가득 찬 불이해의 각박한 사람이 되게 했을까, 까마귀 출몰이 문득 궁금증을 두드리게 한다.

까마귀는 새 중에서 대뇌가 발달해 학습 능력이 좋은 영특한 새이고, 새끼가 떠난 뒤에는 숲의 특정 장소를 보금자리로 이용하고, 편대를 이루어 질서 있게 이동하는 다른 새들과는 달리 이끄는 우두머리가 없어 우리가 보아왔던 것처럼 점점 흩어져 이동하며, 농작물에 해를 주기도 하지만 세상에 이유 없이 태어나 살아가는 무의미한 개체는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들도 생태환경을 이루는 주요한 고유 생명이 아니던가.

아르튀르 랭보의 ‘까마귀 떼’란 명시가 있다. 그 첫 부분에 “주여, 초원이 추울 때/ 무너진 촌락의/ 긴 삼종 소리 침묵 했을 때/ 꽃이 진 자연 위로/ 떨어지게 하소서, 거대한 하늘로부터/ 사랑스럽고 멋진 까마귀 떼를”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와는 달리 까마귀는 불길한 새가 아닌 불길한 징조를 예언하는 새라고 한다. 요즘 들어 까마귀가 자주 등장하는 소식을 접한다. “일본 건물 옥상에 우르르 몰린 까마귀 떼, 지진 예측 했나” 또는 “하늘 날던 까마귀 떼, 갑자기 130여 마리 ‘후두둑’, 제주서 무슨 일” 이런 기사 외에도 까마귀는 희비를 가르는 ‘인싸’로 자주 등장한다.

지금 나타나는 까마귀는 철새인 갈까마귀나 떼까마귀로 좋지 않은 울음소리와 배설물, 엄청난 개체의 검은 날갯짓에 섬뜩하지만, 어느 지역에서는 이를 멀리하는 유해의 새라 치부하지 않고 길조로서 생태체험학습과 관광자원으로 부각하는 일에 정성을 들인다고 하는 반가운 소식도 있다.

보통 생태계는 한쪽만 이익을 취하는 편리공생과 기생물만 이익을 얻고 숙주는 피해를 보는 기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까마귀도 우리와 함께 자연 안에 거하는 생명이니 공생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상리공생相利共生은 쌍방의 생물이 둘 다 이 관계에서 서로 이익을 얻는 것이지만, 적어도 해가 되지 않는 조화로운 관계로 머물 수 있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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