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7일 팽성실내체육관 2층에 원심창기념관 개관
민족자존·한민족 독립의지 알린 원심창 뜻 되새겨

태극기와 폭탄을 든 원심창 의사 캐리커쳐
태극기와 폭탄을 든 원심창 의사 캐리커쳐

 

평택시와 원심창의사기념사업회가 오는 3월 17일 팽성읍 객사리 팽성레포츠공원 팽성실내체육관 2층에 ‘원심창기념관’을 개관한다. ‘원심창기념관’에는 평택의 독립운동가 원심창 의사의 유물이 전시돼 의사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더듬어볼 수 있게 했다. 

전시 유물은 일본에서 발행되는 민족지 <통일일보>가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원심창 의사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다. 특히 해방 후 일본에서 활동한 원심창 의사의 병상일기, 자필 편지 등 개인 자료, 재일동포사회에서의 민족운동과 통일운동을 밝히는데 자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평가된다. 또한 그동안 확인되지 않았던 독립노동당의 당규, 당기, 관련 인물 등은 처음으로 공개되는 자료라는 점에서 정당사에서도 사료적 가치가 크다. 이번에 기탁된 자료는 원심창 의사 생애사를 포함해 재일동포사, 정당사, 통일운동사 등으로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보다 활성화하는 데도 사료적 가치가 크다. 유물은 전체 265종, 7233페이지에 달한다. 

<평택시사신문>은 이번호와 다음호 두 차례의 특집기사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 지배에 맞서 민족자존과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알리고, 민족의 존재를 인식시키는데 기여한 원심창 의사를 평택시민에게 널리 알리고자 한다.  - 편집자 주 -

 

원심창 의사 생가터(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원심창 의사 생가터(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 원심창 의사 기념관 개관을 앞두고… 

오는 3월 17일 팽성읍 객사리 팽성레포츠공원 팽성실내체육관 2층에 ‘원심창기념관’을 개관한다. 이 기념관은 평택시가 예산을 지원하고, 원심창의사기념사업회에서 조성사업을 진행했다.

원심창 의사는 1906년 평택에서 태어나 평생 억압과 차별에 대해 끝없이 투쟁하며 해방 전에는 일본과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해방 후에는 재일동포사회에서 통일운동에 전념했다.

2013년 12월 국가보훈부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원심창 의사를 선정하며, ‘한·중·일 3국에서 적의 심장을 겨눈 아나키스트’라고 표현, 독립운동사에 큰 의미를 지닌 인물로 평가했다.

2018년 평택의 역사 인물 원심창 이야기를 집필한 김인호 교수는 원심창 의사를 ‘자주독립의 심지가 민족통일의 불꽃으로 피었다’하여 책 제목을 

<심지와 불꽃>이라고 지었다. 

이외 원심창 의사의 민족 독립과 조국 평화 통일에 대한 열망, 의지는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원심창 의사 관련 다양한 유물이 2022년 12월 평택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유품은 일본에서 발행되는 <통일일보>가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원심창 의사의 생애사를 포함해 재일동포사, 정당사, 통일운동사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보다 활성화하는데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학자들은 평가한다.

특히, 해방 후 일본에서 활동한 원심창 의사의 병상 일기, 자필 편지 등 개인 자료는 물론 재일 한인사회 활동과 통일운동을 밝히는 소중한 자료로 알려졌다. 확인되지 않았던 독립노농당의 당규, 당기, 관련 인물 등은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원심창 의사는 긴 세월 동안 국내뿐만 아니라 그의 고향 평택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다행히 2014년부터 유족과 뜻있는 지역 인사들이 ‘원심창 의사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추모식’과 ‘육삼정의거기념식’을 비롯해 학술발표, 평전발간 등 선양사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이번 ‘원심창기념관’ 개관은 이처럼 원심창 의사 유가족과 기념사업회의 노력으로 일본에서 보관되던 원심창 의사 관련 유물이 고향 평택으로 돌아옴에 따라 결실을 보게 됐다.

역사 인물 선양사업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선양할 인물을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공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가는 물론 전국 지자체에서는 지역 인물을 조명하고 기억할 공간으로서 많은 기념관을 건립, 선양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평택에도 고장 출신 역사 인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선양할 수 있는 기념관은 많지 않다. 그동안 선양 인물 발굴과 선양사업 추진에 지역사회와 행정기관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을 반증하는 결과다. 따라서 이번 ‘원심창기념관’ 개관을 환영하며 단순히 자료나 유품 등을 전시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시민과 공유하며 평택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역할에 충실했으면 한다.

 

청년 시절 원심창 의사
청년 시절 원심창 의사
천진영사관 폭탄투척 사건 관련 기사(조선중앙일보)
천진영사관 폭탄투척 사건 관련 기사(조선중앙일보)
박열 공판장에서 항의로 체포된 원심창 보도(일본 보지신문, 1926년 2월 7일)
박열 공판장에서 항의로 체포된 원심창 보도(일본 보지신문, 1926년 2월 7일)
일본 작전지도 상의 육삼정
일본 작전지도 상의 육삼정
아리요시 아키라 주중일본공사가 연희를 하려했던 중국 상해 육삼정
아리요시 아키라 주중일본공사가 연희를 하려했던 중국 상해 육삼정

 

■ 원심창 의사의 일생과 업적

우리 고장 평택이 낳은 항일 투사이자 통일운동가 ‘원심창 의사’는 1906년 12월 1일에 팽성읍 안정리 175번지에서 출생했다. 그는 아홉 살에 집에서 멀지 않은 팽성읍 객사리 평택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4년 동안의 학업을 마치고 졸업한다. 평택공립보통학교는 현재의 평택성동초등학교로 발전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평택에서도 3월 9일 현덕면 계두봉을 시작으로 평택 전역에서 치열하게 전개됐는데, 당시 만 13세 소년 원심창은 팽성 부용산 만세운동에 참여했으며, 평택역 만세운동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러한 만세운동의 경험은 소년 원심창에게 평생 민족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에 원심창은 학업에 더 매진하기로 결심하고, 1920년 3월 민족지사가 창설한 학교이면서 신식교육을 가르치는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해 속성과를 졸업했다. 이후 원심창은 고향으로 내려와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한 끝에 배움에 대한 더 큰 꿈과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을 품고 1923년에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난다.

니혼대학에 입학한 원심창은 뜻대로 학비를 조달하지 못해 2학년을 채우지 못하고 자퇴한다. 이때부터 자유노동자로 생활하던 원심창은 틈틈이 도서관에서 독서에 열중하며 새로운 사상인 ‘아나키즘’에 공감하게 된다.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라고도 하지만 ‘인류 진보를 위한 사상’ ‘권위주의적 구조 파괴’ ‘자유사상’ 등으로 표현되며 젊은 청년 원심창을 매료시킨다. 대학 중퇴 후 아나키즘을 수용한 원심창은 독립운동가 박열을 비롯한 많은 동지와 함께 아나키즘 운동 단체에서 활동한다.

원심창이 신문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25년 5월 개최된 ‘도쿄조선무산학생학우회 ’ 정기총회 때다. 그 후 도쿄무산학우회 교양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한 데 이어, 아나키스트 단체 ‘흑우회’ 재건을 주도하고, ‘흑색전선연맹’, ‘흑풍회’ 등에서 아나키즘 운동을 진행한다.

이처럼 원심창은 항일 투쟁은 물론 반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뿐만 아니라 친일 단체 ‘생애회’와의 투쟁을 비롯해 신간회를 둘러싼 공산주의자들과의 대립 속에 이른바 ‘유학생 학우회 사건’ 및 흑우연맹 난입사건으로 약 2년여 간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감옥에서 보석으로 풀려난 원심창은 한동안 <흑색신문> 발간에 심혈을 쏟는다. <흑색신문>에 심혈을 기울인 경험이 훗날 일본에서 <통일일보>를 발간하는 데 큰 경험이 됐다. 

원심창의 항일 반공 이념은 민족해방과 ‘무지배, 무권력’의 새로운 세상을 지향한 조선인의 아나키즘 특성을 잘 반영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원심창은 동족끼리의 과도한 갈등과 폭력에 대한 회의, 민족협동전선에 대한 무지는 그에게 고민을 안겨주는 동시에 새로운 아나키스트의 삶을 꿈꾸게 해 1931년 중국으로 망명을 결심한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원심창은 ‘남화한인청년연맹’에 참여해 의열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1932년 11월에 텐진 일본영사관과 일본 병사에 폭탄을 투척했고, 이듬해인 1933년 3월 1일에 ‘항일선전문’을 기획 작성해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배포하며 선전했다.

이어 원심창 의사는 3월 17일 백정기, 이강훈과 함께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주중 일본공사를 폭살시키려는 그 유명한 중국 상하이 ‘육삼정(六三亭)의거’를 시행하려다 거사 직전 일본 첩자의 밀고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 ‘육삼정의거’는 ‘이봉창 의사 의거’, ‘윤봉길 의사 의거’와 함께 일제 때 해외 3대 의거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육삼정의거’로 인해 원심창 의사는 나가사키 지방재판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3년간 복역하던 중 1945년 해방을 맞아 출옥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일생을 일본과 중국 등 국외에서 민족운동과 통일운동을 전개한 원심창 의사는 1971년 7월 4일 일본에서 65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형무소 수감에 앞서 촬영한 원심창 의사 사진
형무소 수감에 앞서 촬영한 원심창 의사 사진
원심창 의사 주도로 설립한 조국통일촉진재외민족회의(테이블 가운데 회의 주재자가 원심창)
원심창 의사 주도로 설립한 조국통일촉진재외민족회의(테이블 가운데 회의 주재자가 원심창)
조국통일촉진회의 기념 사진의 원심창(앞줄 왼쪽 첫번째 인물)
조국통일촉진회의 기념 사진의 원심창(앞줄 왼쪽 첫번째 인물)
통일일보 도쿄아카사카본사
통일일보 도쿄아카사카본사

 

■ 재조명되는 원심창 의사의 통일운동

지난 2023년 10월에는 팽성레포츠센터에서 ‘사료로 재조명하는 원심창의 독립투쟁과 통일운동’이라는 주제로 ‘원심창의 날 학술세미나’가 진행됐다. 이날 발표된 주제는 ▲통일일보 기탁 원심창 의사 자료의 유형과 가치 ▲원심창의 재중 의열투쟁과 육삼정 의거 ▲통일일보 기탁 자료로 본 원심창의 통일운동이다. 토론 주제에서 보듯 원심창 의사는 다른 독립운동가와 달리 민족해방 후에는 재일동포사회의 안정과 권익획득 그리고 통일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1945년 해방 후 국내는 물론 재일동포사회에서도 광복의 기쁨도 잠시 혼란을 겪게 된다. 이에 원심창 의사는 무엇보다 동포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는 질서 있는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재일동포 지도자로서 ‘재일본 조선 거류민단(현재의 재일민단)’을 결성해 실무 책임자인 초대 총장으로 활동한다. 그 후 제11대, 제12대 재일민단 중앙 단장으로 재임해 재일동포사회 안정과 조국의 평화를 염원한다. 

1950년 6·25전쟁 때에는 북한 남침에 맞선 자유대한민국 수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침략전쟁을 극복함으로써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 국가건설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원심창 의사는 ‘남북통일촉진협의회(통협)’를 결성하고 나아가 통일운동계몽지이자 민족지인 <통일일보>를 창간, 언론 활동을 통해 재일동포와 일본 사회에 한민족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언론을 통한 이론적 통일론 방안제시와 실천적 통일운동 조직 운영 등 ‘통협’ 노선을 계승 발전시켰다.

이처럼 원심창은 해방 후 재일동포의 권익옹호는 물론 남북 평화와 통일의 협력을 위한 노력으로 재일동포사회 발전의 초석을 다지고, 대한민국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국내외 최초의 좌우합작 통일운동단체 통협을 구성한 것은 통일 대한민국의 미래상을 제시한 것으로 읽힌다.

그의 평생 동지였던 이강훈은 “그는 남을 위해 자기를 바쳤으며, 성격은 온순하고 인자했지만, 조국과 민족에 해를 끼치는 무리에 대해서는 강한 적개심과 용맹을 갖췄고, 민족 도의심과 지용을 겸비했다”라고 원심창 의사를 평가했다. 

원심창 의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광복 후에는 통일운동 그리고 재일본 사회 지도자로 공헌을 인정받아 그가 사망하자 1971년 8월 25일 일본 도쿄에서 재일한국인 최초로 의사(義士) 추존과 함께 재일본 한국인 사회장을 거행하게 된다.

원심창 의사 신분증(대한민국 주일대표부 발행)
원심창 의사 신분증(대한민국 주일대표부 발행)
원심창 의사 관련 유물(원심창기념관 소장)
원심창 의사 관련 유물(원심창기념관 소장)
원심창의사 친필 편지
원심창의사 친필 편지
도쿄 병원에서 쓴 원심창 의사 유언
도쿄 병원에서 쓴 원심창 의사 유언

 

■ 원심창 의사의 꺾이지 않은 마음

원심창 의사는 자신이 몸소 실천해 일제에 큰 타격과 손실을 입힘으로써 독립 달성의 희망을 지속해서 불어넣어 국민의 가슴 속에 잠들어 있는 민족의식을 일깨워줬다.

일제 지배에 맞서 민족자존의 유구한 전통과 민족 동질성을 되살리며 수호하려는 대열에 원심창 의사가 최선봉에 섬으로서 민족정기 보전과 재확립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원심창 의사의 육삼정의거’는 중국 상해 의열 단체의 연속적 투쟁의 정점으로 표출된 것으로 평가된다.

원심창 의사의 이와 같은 의열투쟁은 독립운동의 침체와 위기를 딛고 일어서서 다시 웅비하는 활력소가 돼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 저항 민족의 존재를 인식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원심창 의사는 ‘재일본 대한민국민단’ 창립의 실무적 총책임자로서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한 ‘모국사랑’의 실천적 활동으로 재일동포 사회통합에 큰 역할을 했다. 일본사회에서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 되었던 재일동포에 대한 생활권 확보와 생활 안정 도모는 물론 한민족 정체성 확립에 기여한 것이다.

영주권 부여와 기득권 유지 등 재일동포에 대한 법적 지위 안정을 위한 권익획득 운동은 민족운동이며, 독립운동의 연장선으로서 재일 동포사회 재건에 큰 공을 세운 일들이다.

1950년 6·25전쟁 때에는 북한의 남침에 맞선 자유대한민국 수호 활동에 적극 참여, 침략 전쟁을 극복함으로써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 국가건설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이처럼 원심창 의사는 꺾이지 않은 마음으로 평생을 민족의 독립과 평화통일의 염원을 안고 생을 마감한 분이다.

이러한 점을 뒤늦게 확인한 정부는 원심창 의사에게 1977년 독립운동 유공 ‘독립장’을 추서했고, 2013년 12월 국가보훈처에서는 상해 육삼정 의거의 주역 ‘원심창 의사’를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지정했다.

원심창 의사 장례식 모습
원심창 의사 장례식 모습
원심창 의사 영면 기사를 1면에 다룬 통일조선신문
원심창 의사 영면 기사를 1면에 다룬 통일조선신문
원심창 의사 건국훈장국민장 훈장증(1977년 12월 13일)
원심창 의사 건국훈장국민장 훈장증(1977년 12월 13일)

 

■ 부용산 기슭에 원심창 의사 기념관을… 

역사 인물 원심창 의사가 그의 고향 평택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2012년 7월 4일 서거 41년 만에 처음으로 팽성국제교류센터에서 ‘제41주기 추모식’을 거행하면서부터이다. 이를 계기로 ‘원심창의사기념사업회’에서는 매년 3월 17일 ‘상해 육삼정 의거 기념식 추모행사’를 시행하게 된다. 또 1945년 10월 10일 원심창 의사 출소일을 기념하기 위해 ‘원심창의 날’을 제정하고, 기념식과 함께 생가터 걷기 등 다채로운 행사를 펼쳐오고 있다. 이후 매년 기념식과 학술토론회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는 그의 삶의 궤적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와 공산주의에 철저히 저항하면서 자유와 평등, 조국 독립과 평화통일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위해 애쓴 그의 꿈과 희망을 재인식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그동안 원심창 의사의 독립·통일운동 조명을 위해 평택문화원에서는 평택 인물지 원심창 이야기 <심지와 불꽃>을 발행했다. 그동안 사업회와 학계, 종중의 노력으로 원심창 의사 관련 책자 5권이 출판됐고, KBS 등 언론매체 보도가 활발히 전개됐으며 학술지에 논문 13편 이상이 발표됐다.

1991년에는 원심창 의사의 모교 평택성동초등학교 교정에 ‘원심창 의사 동상’이 건립됐고, 2017년 9월 원심창 의사의 동상은 ‘이달의 독립운동 현충 시설’로 지정됐다. 2020년에는 K-6 캠프험프리스 정문에서 팽성농협 미곡종합처리장까지 2.9㎞ 구간 도로를 ‘원심창로’로 명명했으며, 팽성읍 안정리 원심창 의사의 집터 인근에는 ‘경기도 항일문화유적지 표지판’을 설치했다.

해외 선양 활동으로는 2013년 ‘육삼정 의거 80주년 기념식’을 중국 상하이 현지에서 거행했고, 2016년 재일민단은 민단 창단 70주년 행사에 원 의사의 유족을 초대해 원심창 의사에 공로패를 수여하기도 했다. 이밖에 원심창 의사 사진 전시회, 추모 연극공연 등 다채로운 사업이 펼쳐졌다.

2023년 3월부터는 기존 ‘건국훈장 독립장’에서 ‘대통령장’으로 원심창 의사 서훈을 상향하기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했고 평택시의회에서도 ‘서훈 상향 결의문’을 채택해 힘을 실어줬다. 이는 1977년 ‘독립장’ 추서 당시 공훈록 공적 사항에 빠졌던 독립운동 당시의 추가 공적과 통일운동 관련 업적이 새롭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원심창 의사’가 이번 ‘원심창기념관’ 개관을 계기로 우리 고장 평택이 낳은 대표적 역사 인물로 널리 선양되고, 그의 업적과 자주독립, 평화통일 정신을 배우려는 노력이 계속 이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원심창기념관’ 규모가 협소해 원심창 의사의 많은 유물을 모두 전시할 수 없어 기념관의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제대로 된 새로운 정식 기념관이 필요한 것이다. 머지않은 장래에 원심창 의사의 독립정신과 평화통일에 대한 꺾이지 않은 마음(心)을 담은 정식 기념관이 역사적인 장소 부용산 기슭에 새롭게 건립되길 바란다.

대전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잠든 원심창 의사
대전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잠든 원심창 의사

 

■ 원심창 의사의 업적이 담긴 ‘원심창기념관’

‘육삼정 의거 제91주년 기념식’을 맞아 오는 3월 17일 개관하는 ‘원심창기념관’은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팽성실내체육관 2층에 자리 잡고 있다.

팽성읍은 평택의 뿌리이다. 고려시대 이후 평택현이라 불렸고, 고을 중심에 위치한 부용산을 진산으로 관아를 비롯해 객사, 향교, 그리고 천년 고찰 자비사(옛 망한사) 등이 있는 지역이다. 

‘원심창기념관’ 조성의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후손을 비롯해 지역주민과 원심창의사기념사업회에서 제기돼 왔다. 이번에 개관하는 ‘원심창기념관’은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그분의 일생과 업적인 독립운동, 평화통일운동, 재일동포사회 지도자로의 역할과 삶을 기억하고 계승 발전시키는 선양의 장이 될 것이다. 그리고 원심창 의사의 생애는 지역사와 연계해 평택의 정체성과 시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원심창기념관’ 기획자는 “기념관 구성과 전시라인은 원심창 의사의 생애와 삶에 대한 본질적이며 구체적인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분류하는 식으로 구성됐다”고 설명한다. 또한 그곳에 담긴 내용은 원심창의 일생과 삶의 내용으로 “독립운동, 통일운동, 재일 동포사회에서의 활동에 대해 주제별 다양한 활동과 삶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인식하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다”라고 전시 방향을 밝혔다.

구체적 전시내용을 소개하면 기념관은 크게 4개 세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제1세션은 안내판이 설치돼 ‘원심창기념관’ 전시 공간을 종합적으로 안내한다. 그리고 원심창 의사의 일생과 삶을 상징하는 이미지 전달과 원심창의 일생을 시계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다음으로 ▲제2세션은 원심창 의사의 삶과 가계도 즉 학창 시절, 유학 생활 등을 소개한다. 그리고 원심창의 일본 활동과 해방 후 재일동포사회 동향, 민단 활동, 한국전쟁과 일본 사회 현황과 원호사업 등을 소개한다. 아울러 원심창 의사 서거와 재외동포 최초 사회장 거행을 소개하며, 그의 마지막 삶을 평가 정리하는 코너다. 

이어 ▲제3세션은 원심창 의사의 독립운동, 서울에서의 3.1운동과 평택지역 3.1운동, 특히 어린 시절 ‘부용산4.1만세운동’, 일본에서 원심창의 아나키즘 수용과 활동을 소개한다. 아나키스트로서 흑우회 등 관련 단체 활동과 중국 망명과 한인사회의 민족운동, 원심창의 중국 아나키스트 활동을 알려준다. 또 원심창 의사의 육삼정 의거, 재판과정에서 원심창의 독립 의지, 옥중 생활과 해방 후 석방과정을 소개한다.

마지막 ▲제4세션은 통일운동, 남북평화통일촉진운동협의회 소개와 활동, 원심창의 통일 이념 소개, <통일일보> 창간과 언론 활동을 담았다. 

원심창 의사는 일본 제국주의 지배에 맞서서 민족자존과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알리고 민족의 존재를 인식시키는데 기여한 분이다.

평택이 낳은 인물 원심창 의사가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평생을 독립운동과 통일운동에 헌신하였음을 ‘원심창기념관’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작은 규모의 ‘임시’ 기념관이지만 원심창 의사의 조국 사랑 정신을 널리 선양해 평택시민은 물론 외지의 많은 관람객이 찾아주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해본다.

 

글·이광섭 평택시문화관광해설사
편집·김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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