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을 넘어 전 국민이
함께하는 기념관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성주현 소장평택박물관연구소
성주현 소장
평택박물관연구소

기념은 ‘뜻깊은 일이나 사건을 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김’을 의미하고, 기념관은 ‘뜻깊은 일을 오래도록 기념하기 위해 지은 집’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기념관은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인물’과 관련된 기념관은 기념할 만한 가치가 있을 때 건립한다. 그렇다면 어떤 인물을 기념해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최근 모 인물에 대한 기념관 건립과 관련해 적지 않은 논쟁이 일고 있다.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념관은 이러한 생각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국가나 지자체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발굴,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해 다양한 기념관을 건립하고 있다. 평택에서도 지난 3월 17일 최초로 인물을 대상으로 한 기념관이 개관됐다. 다름 아닌 ‘원심창기념관’이다. 

원심창 의사는 평택 팽성에서 출생해 3·1운동에 참가했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하면서 아나키즘을 수용했다. 이를 계기로 박열과 같이 흑우회에 가입했으며, 1924년 8월 아나키즘 계열의 노동조합인 동흥노동조합에 가입해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1926년 5월에는 아나키즘 사상을 구체적으로 전파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기관지 <흑우> 제2호를 발간하고 널리 알렸다. 이어 1928년까지 흑풍회와 흑우연맹을 조직하면서 아나키즘 사회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1929년 4월에는 일본 도쿄유학생학우회 사건으로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원심창은 출옥 후 일본의 감시에서 벗어나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1931년 6월 상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해 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11월 흑색공포단을 조직하는 데 참여하고 의열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1932년 11월 톈진 일본영사관과 군 병영 등에 폭탄을 투척했으며, 1933년 3월 17일 이강훈, 백정기 등과 같이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有吉明를 제거하려고 시도했으나 밀고로 일경에 붙잡혔다. 이후 원심창은 일본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1945년 10월 해방을 맞이해 출옥했다. 조국으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원심창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을 조직하는 데 이바지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통일운동에 매진했다. 

원심창은 국내와 일본, 중국 등 삼국을 넘나들면서 조국의 독립과 통일에 일생을 바친 유일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원심창의 삶을 기념하고 기억·계승하기 위해 기념관을 건립했다. 개관식에서 한시준 독립기념관장은 “원심창기념관 건립은 국기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기념관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역사적·교육적 의미와 미래 가치가 있어야 한다. ‘원심창기념관’은 기념관의 의미에 가장 충실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원심창의 미래 가치는 그 어느 때보다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원심창기념관’이 평택이라는 지역을 넘어 전 국민이 함께하는 기념관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택시민부터 ‘원심창기념관’을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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