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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보고 …멍게처럼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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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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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과 분노는 어쩌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 그 일에 대한 약속이
영화의 제목처럼 ‘또 하나의 약속’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약속이 아닌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이리라.
그 숙제는 멍게가 되면 하지 못할 일이 되어 버린다


주말에도 매일 출근을 하고 있는 남편, 시댁과 친정을 오가며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챙겨야 하는 나. 우리 가족은 가족나들이 한번 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 주말, 웬일인지 남편은 내 얼굴을 보며 은근한 미소와 함께 ‘오랜만에 우리 가족 다 같이 영화 한편 볼까?’ 라고 한다. 어제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들어와 밤새 코고는 소리에 밤잠을 설친 나는 미운 마음에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졸라대는 남편의 성화에 못이기는 척 아이들과 길을 나섰다.
그렇게 우리 네 가족은 ‘또 하나의 약속’을 만났다.
차창 밖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울산바위를 소개하는 택시기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영화 포스터에 있는 ‘세상을 울린 아버지의 뜨거운 또 하나의 약속’이라는 카피만 알고 있던 나는 ‘택시기사 가족의 이야기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택시기사 상구(박철민)의 고향은 강원도다. 친정엄마가 강원도 영월인 나에게 상구의 구수한 사투리는 나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초등학교 밖에 못 나왔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강원도 택시기사 상구, 집안 사정이 변변치 않아 동네 소일거리를 하는 아내 정임(윤유선), 착실하게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큰딸 윤미(박희정)·남동생 윤석(유세형).
단란한 가족에게 큰 비극이 다가온 것은 맏딸 윤미가 집안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진성기업(반도체 공장)에 취직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백혈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부터다.
대학진학 대신 취업을 택한 맏딸이 못내 대견했던 두 부부에게 딸의 죽음은 단순한 혈육의 상실을 넘어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딸의 투병과정을 지켜보는 과정과 택시 안에서 눈도 못 감은 채 숨진 딸을 위해 상구는 반드시 하나 밖에 없는 딸의 원혼을 달래주리라 다짐한다.
그리하여, 산재 신청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회사 측에서는 합의금 10억 원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외로운 투쟁은 멈추지 않는다. 회사와의 싸움과정에 노무사(김규리)의 도움과 딸이 근무하던 공장의 같은 라인, 상당수 노동자들도 백혈병·림프종·피부암으로 치명적 질환을 앓고 있으며, 이미 사망하거나 투병중인 퇴직자들이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렇게 진성그룹의 피해자들은 힘을 모은다.
이미 그들은 ‘또 하나의 가족’이었다. 이 새로운 가족은 가족 구성원들의 의지가 아닌 진성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가족이다.
그렇게 지루한 싸움 끝에 윤미의 산재신청은 받아들여진다.
영화를 보고나서야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삼성반도체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된 나. 사건의 내용을 다 알고 나니, 정작 나를 사로잡은 건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1년 8개월 만에 백혈병을 얻어 2007년 3월, 25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 황유미 씨였다.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 또한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제작두레’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시민들이 제작비 15억 원 전액을 모은 영화였다. 제작두레(http://anotherfam.com)를 통해 모아진 금액에서 발생된 수익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피해지원에 사용된다고 한다. 2월 21일 현재 8244명이 3억 원이 넘는 금액을 모았다고 한다.
또한, 이 영화는 개봉을 앞두고 상영관 확보가 되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영화, 특히 삼성그룹의 폐해를 소재로 다룬 영화라서 더욱 그럴 것이다. 이런 어려움을 알게 된 몇몇 연예인들은 영화의 확산을 위해 힘을 썼다고 한다. 컬투(정찬우·김태균)·이경영·조달환은 자비를 들여 상영관 객석의 표를 수십에서 수백 장씩 구입한 뒤 다양한 방법으로 일반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은 아이들에게 주저리주저리 떠들기 시작했다. 소수자의 고통과 아픔을… 공리주의가 무엇이며, 벤담과 칸트·롤즈·마이클 샌델의 ‘정의’에 대해서도 떠들어 댔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 중학생인 아이들이 알아들을 리 만무한데도 말이다.
그래도 공무원인 남편이 사회의 정의를 위해 열정적으로 떠들어대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싫지만은 않았다.
“멍게는요, 태어날 때에는 뇌가 있는데, 바다 속에서 자리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뇌를 자양분으로 삼아 소화시켜 버리고 식물이 되어 버린대요” 라는 상구의 대사. 과연 우리는 지금 멍게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가?
원한과 분노는 어쩌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 그 일에 대한 약속이 영화의 제목처럼 ‘또 하나의 약속’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약속이 아닌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이리라. 그 숙제는 멍게가 되면 하지 못할 일이 되어 버린다.
오늘밤은 아이들을 일찍 재우고 남편과 함께 멍게에 소주한잔 기울이며 멍게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해야겠다.


   
 
김영미 주부
지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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