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7월 23일

 

1932년 인구조사, 7만여 명 돌파
1년간 1596명 증가한 것으로 집계

 
“지구는 그대로 있고 늘어나는 것만이 인구이다. 진위군(振威郡) 인구조사 통계에 수자로 나타난 1932년도 인구별 호수를 본다면 진위군내 총 호수 1만 1천 9백 95호에 남녀 합 7만 1천 2백 3인이라는데, 작년에 비하여 1천 5백 96명이나 증가되었다고 한다.”(『동아일보』 1933년 7월 23일)
인구조사는 예나 지금이나 매우 중요하다. 7월 30일 치러지는 평택을 보궐선거에서 모 후보는 평택인구를 1백만의 국제도시로 만들겠다고 공약을 했다. 평택 인구가 1백만을 헤아리려면 언제쯤일까 자못 궁금하다. 그렇다고 실망할 것은 없다고 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45만의 평택이 이제는 1백만을 넘보는 거대 도시로 발전할 것이니까. 사실 현대도시는 인구 1백만이 되어야 도시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한다.
인구조사는 현대사회뿐만 아니라 전근대사회에서도 꾸준히 진행되었다. 그렇다면 인구조사는 왜 했을까 하는 점이다. 과거에는 인구조사를 ‘전쟁’이나 규모가 큰 ‘대단위 공사’를 위해서 이루어졌다. 고대 사회는 전쟁이 부족이나 국가의 존립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구조사를 했다. 또한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대규모의 공사를 추진하기 위해서도 인구조사는 매우 중요했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에 인구조사를 했다. 당시에는 호구조사(戶口調査)라 했다. 인구조사는 전쟁과 공사를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세금을 걷는데 이용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국가의 좋은 정책을 세우기 위해 인구조사를 한다. 인구가 늘어나면 늘어나는 만큼 그에 맞는 정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평택지역의 인구 통계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조선초기에는 대략 3700명 정도였다. 조선후기 1789년 호구조사에 의하면 3만 3093명으로 늘어났다. 비록 일제강점기이지만 근대 들어 본격적인 인구조사가 이루어진 1924년에는 1만 1577호에 6만 3090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1932년에는 7만여 명이었다. 정확하게는 총 호수 1만 1995호, 7만 1203명으로 전년도인 1931년보다 1596명이나 늘어났다.
일제식민지 시기이지만 평택(당시는 진위군)의 인구가 적지 않게 증가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사거리가 될 정도로 말이다. 이처럼 평택에 인구가 늘어난 이유는 경부선 철도 평택역 신설이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뿐만 아니라 평택역은 쌀의 이출입이 가장 컸던 역 중의 하나였다. 2014년 6월 현재 44만 5664명의 평택에 비하면 당시의 인구가 현저하게 차이가 나고 작은 도시에 불과하였지만 당시만 해도 평택이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자라나는 아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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