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사원과 어울렸다’ 이유 쫓겨나
평택리 살던 성금란이란 22세의 첩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 김범용(金範用)의 첩 성금란(成錦蘭, 22)은 지난 12일 오후 3시반경에 그 부근 통복리천(通伏里川) 다리에서 비녀를 입에 물고 십여 길이나 되는 다리 아래로 뛰어내린 것을 그 근처 비전리(碑前里) 권모(權某)가 발견하고 응급구원을 하였으나 생명이 위독하다는데, 그 내용은 즉 전기 금란이가 평택리에서 주식 영업을 하는데 수일 전에 그 곳 형평사원(衡平社員) 수삼인과 함께 청요리를 사다 먹은 것이 도화선이 되어 백정과 비밀한 관계가 있다는 말까지 났음으로 본부 김범용은 창피하다 하여 같이 살 수가 없다고 내어 쫓음으로 이것을 비관하여 그와 같이 자살코자 함이라더라”(동아일보 1927년 9월 15일)

현재의 가족제도는 일부일처(一夫一妻)이지만 전근대사회였던 조선시대는 일부다처(一夫多妻)였다. 오늘날 일부일처제는 사회에서 일반적인 관례로 자리 잡았지만 일부에서는 여전히 보이지는 않지만 비상식적으로 일부다처(?)가 유지되고 있다. 요즘은 첩(妾)이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사라졌지만 일부다처 사회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그리고 마땅히 비난받아야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만 해도 첩을 두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에 사는 김범용도 22살의 성금란이라는 아리따운 여성을 첩으로 두었다. 성금란은 평택리에서 주식(酒食) 영업을 했다고 하는데 일종의 술집을 운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던 어느 날 형평사원 3~4명과 함께 청요리(淸料理) 즉 중국 음식을 사다 먹은 것이 발단이 돼 결국 자살미수에 이르렀다.
형평사는 일제강점기 전근대시대 천하게 대접받던 도살업을 하는 백정의 인권옹호운동과 신분차별철폐를 주도했던 사회단체였다. 평택에는 평택과 서정리에 각각 지회가 있었다. 형평사운동으로 백정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는 있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백정을 천대했다. 김범용 역시 백정을 천하게 여겼던 것이다.
첩인 성금란이 백정 출신의 형평사원과 어울렸다는 것이 창피했던 김범용은 앞으로 같이 살 수 없다고 성금란을 내쫓았다. 이를 비관한 성금란은 통북천 다리에서 비녀를 물고 뛰어내린 것이다. 마침 지나가던 권 씨라는 사람에 의해 다행히 목숨은 건져 미수에 그쳤지만 위독한 상태였다. 지금이야 통복천 다리 밑을 흐르는 수량이 많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수량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살할 정도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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