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9월 28일 
 

도두리 정운봉, 장날마다 가마니 1장 저축
승입저축조합 설립, 군에서 표창·상금 전달


 
“진위군 서면 도두리는 70여 호의 빈촌으로 刻一刻 느끼는 里民의 생활난을 각오한 정운봉군은 大正 13년(1924년)도에 총 繩叺貯蓄組合을 該里에 창립하고 조합원으로부터 每市(5日隔)  1매씩 조합에 저축케 하여 오던 바, 昭和 2년(1927년) 1월분에 其間 저축된 전액 중으로 農糧資金 20원씩을 각 조합원에게 분급하여 많은 효과를 보고 잔금은 조합기본금으로 繩叺의 資料 등을 구입하여 대여 장려한 결과 그 성적은 양호하여 현재는 수백 원의 융통을 보게 되었다 하며, 군 당국에서도 此를 표창하기 위하여 金 10원까지 賞與하였다는데, 君은 此外에도 興農組合 등을 설립하여 농사개량 등 실로 농촌사업에 공헌이 不少하다더라.”(동아일보 1928년 9월 28일)

오늘날에는 가마니를 사용하는 사례가 많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후반만 해도 그 용도가 적지 않았다. 주로 쌀가마나 볏가마니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가마니는 원래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1900년대 초 일본에서 전래되었다. 가마니가 들어오기 이전에 ‘섬’이라는 것을 활용했다. 그런데 가마니에 비해 사용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실용성에서도 가마니보다 불편하자 점차 사라졌다.
쌀로 유명했던 평택은 1920년대만 해도 전국에서 가마니로도 유명했다. 연 생산량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었다. 승(繩)과 입(叺)은 ‘새끼’와 ‘가마니’로, 농촌에서는 필수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보니 이들 생산량을 높이고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승입저축조합(繩叺貯蓄組合) 즉 새끼와 가마니 저축조합이 생겨났다. 평택에 승입저축조합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920년대 초만 해도 각지에 적지 않은 조합들이 설립되었다. 도두리에 승입저축조합을 설립한 정운봉(鄭雲鳳)은 조합원에게 1924년부터 장날마다 가마니를 1장을 저축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기반으로 1927년 1월 조합원에게 영농자금 20원씩 나누어주었다. 이외에도 농촌의 발전과 농가의 이익을 위해 흥농조합 설립·농사개량 등 적지 않게 공헌한 바 있다. 오늘날 농촌지도자라고 평가할 만하다. 이러한 정운봉의 활동에 대해 당시 진위군은 표창을 하고 부상으로 10원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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