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사벌택지개발사업 이전의 비전1동 배다리골(왼쪽 위)과 가내마을(가운데 아래), 옛 삼남대로 항공사진(2005년)

 

이괄의 난을 피해 피난 가던 인조 임금이
물맛을 보고 옥관자를 내린 옥수정은
칠원동 칠원주막의 중심에 있었다



 

▲ 택지개발 이전의 비전1동 배다리골 항공사진(2005년)

2- 칠원주막-왕도 쉬어가고 장돌뱅이도 묵어갔던 주막거리

주막은 ‘길의 정거장’이었다. 삼남대로처럼 큰길가의 주막은 왕도 쉬었다가고 고관대작과 부상대고들도 머물다 갔다. 지역과 지역, 마을과 마을을 연결했던 작은 길목에는 민중들의 주막이 있었다. 민중들은 주막에서 갈증을 해소하고 허기진 배를 채웠으며 세상소식을 접했다. 때론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모의장소가 될 때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옛 주막에는 사람냄새, 다양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잊혀져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과거 우리의 자화상이며 그리움이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8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그리고 주막에 얽힌 에피소드를 풀어 놓으려 한다. 독자들의 애정과 관심을 기대한다. - 편집자 주 -

 

 

■ 가내주막 색시는 참 예뻤다

▲ 죽백동 재빼기마을
소사주막을 지나 배다리를 건너면 길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옛 산직촌 뒷길은 갈원으로 가는 직선로였고, 구원봉·두래봉을 넘어가는 길은 ‘재빼기’와 ‘가내’로 우회하는 길이었다. 사람들은 직선로보다 재빼기로 오르는 곡선로를 선호했다. 재빼기 아래에는 술맛 좋은 ‘가내주막’이 있었기 때문이다.
죽백동 3통 재빼기라는 지명은 조선 전기부터 있었다. 이것이 마을지명으로 정착된 것은 근대 이후다. 재빼기는 1911년에 작성된 <조선지지자료>에 ‘대백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어쩌면 그 전에도 재빼기보다는 ‘댓빼기’ 또는 ‘대백’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주민들은 댓빼기라는 지명의 유래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옛날에는 상민(상놈)들이 양반 앞에서 담뱃대를 물고 다니면 혼났기 때문에 옷 속에 숨겨 다녀 유래되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이몽룡이 춘향이를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가다가 고갯마루에서 담뱃대를 빼물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모든 주장에는 역사가 있고 일리가 있지만 죽백동 3통의 공식 지명은 고개를 의미하는 ‘재빼기’다. 주민들은 그것을 평택사투리로 ‘댓빼기’로 불렀고, 이것이 한자화하면서 대나무 죽竹자를 써서 ‘죽백竹柏’이 되었다.
윤태헌(1934년생·남)씨는 재빼기마을의 토박이다. 일제강점기 어머니의 태중胎中에 있을 때 이사하여 지금껏 살았다. 그의 기억 속에 재빼기마을은 40여 호가 모여 살았던 무척 가난하고 빈한한 마을이었다. 주민들은 마을 주변에 널려 있던 일본인이나 조선인 과수원에서 일하며 그날그날을 살아냈다. 윤태헌 씨도 젊은 시절 마을을 떠나 고공살이와 과일행상을 하며 돈을 모았다. 40~50대 무렵에는 사업이 잘 되어 상당한 돈도 모았지만 허망하게도 IMF가 모든 것을 앗아갔다. 
조선후기의 주막은 나루터나 고개 입구 또는 고개 너머나 갈림길에 있었다. 가내마을은 삼남대로와 평택~원곡길의 갈림길이었고 통복천을 넘기 전 물때를 기다리는 정거장이었다. 가내 앞 통복천은 항상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때때로 안성천 하구에서 밀물이 밀려들면 강폭이 넓어져 썰물 때를 기다려야만 건널 수 있었다. 윤태헌 씨는 해방 전후 가내주막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거기는 길목이여. 그러니께 사람이 많았지. 모두 여섯 집이 살았는디 그 중에 세 집이 주막을 혔어. 한 집은 육간집精肉店이었고. 다른 한 집은 담배를 팔았을 껴”
큰 길이 갈라지는 사거리에 납작한 초가삼간의 주막집. 일제 말 주막에는 기생도 있었다. 비록 시골 주막의 기생이었지만 이들은 가야금도 타고 소리도 할 줄 알았다. 얼굴에 지분을 바른 자태도 가난에 찌든 마을 처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주막집에서 기생 끼고 술 마시는 건 돈푼께나 있는 한량들이나 배과수원을 하는 일본인, 일본 순사들이었지만, 때로는 동네 청년들도 기웃거렸다. 성업成業 중이던 가내주막은 한국전쟁 뒤 모두 문을 닫았다. 삼남대로의 쇠퇴도 문제였겠지만 한국전쟁의 좌우익 갈등이 가져온 결과라고 생각된다.

 

▲ 삼남대로 죽백동 성안마을 구간

 


■ 새마을운동 이전부터 주막거리였던 칠원1동

▲ 갈원주막이 있었던 칠원동 주막거리
칠원동 1통은 갈원葛院이 있었던 원촌院村이다. 갈원은 조선후기 평택지역의 8개 역원驛院가운데 대표적인 주막이었다. 삼남대로는 갈원에서 충청수영로와 분기하였다. 다시 말해서 충청도 사람이나 전라도 사람은 갈원을 거치지 않으면 한양으로 갈 수 없었다는 말이다. 역원에는 주막과 마방·우물이 있었다. 원촌院村의 사람들도 주막에 관계되었거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뿐이었다. 충청도가 고향이었던 조선 중기의 학자 조익의 <포저집浦渚集>에는 갈원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시골 객점 하나가 갈림길에 임해 있고, 집 주위에 푸른 산이 띠처럼 둘렸어라.
마을 주변엔 세버들이 휘휘 늘어지고, 언덕 위엔 이름 모를 꽃들이 산뜻해라(중략)”
갈원주막은 갈림길에 있었다. 주막 뒤로는 산등성이가 띠처럼 둘러서 있었고, 마을에는 세버들이 여러 그루 자라고 있었다. 작자作者가 언덕 위에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한 것을 보았다면 계절은 꽃피는 춘삼월이었을 게다. 하지만 조익은 갈원주막 풍경을 묘사하면서 한 가지를 빠뜨렸다. 바로 ‘옥수정玉水井’이다. 우물은 주막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지만 옥수정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 인조 때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피난 가던 임금이 물맛을 보고 당상관이 패용하는 옥관자를 내렸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충북 보은의 ‘정2품송’에서 본 듯한 스토리.
칠원1동 주막거리는 ‘윗거리’와 ‘아랫거리’로 구분한다. 오래전 두 마을은 신분적으로도 생활조건도 조금씩 달랐다. 우물은 두 마을의 중심이었다. 생활경계도 우물이 결정하였다. 윗거리는 윗우물, 아랫거리는 아래우물 같은 식이다. 혹여 물이 부족하거나 빨래터가 부족하여 서로의 우물을 이용할 때도 서로의 생활권과 기득권을 존중해줬다.
김영호(1935년생·남), 이순희(1939년 생·여) 부부는 칠원동 1통 토박이다. 김영호는 칠원리새마을운동의 신화적 인물 김기호의 동생이다. 비록 형님은 먼저 세상을 떴지만 아직도 그의 입에서는 형님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 동생이 기억하는 형님은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진취적이었다. 일제강점기 원평동의 진청학원(현 중앙초등학교)을 다닐 때에도 남들보다 먼저 등교하여 공부하였고,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들으며 독학으로 영어를 익혀 미군부대에 입사하였다. 김기호는 성실함과 진취적인 사고로 가난에 찌든 주막거리 마을을 전국 새마을 우수마을로 탈바꿈시켰다. 수백 년 대물림된 가난을 털어버리고 자립의 기반을 닦은 것도 이 때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는 김기호 씨가 남긴 유산들이 남아 있다. 그 유산들 위에서 현재의 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다.

 

 

▲ 마을빌딩과 칠원주막이 있었던 고구마밭

 

 

■ 갈원주막은 모두 두 개였다

▲ 옥수정과 갈원주막 풍경
갈원은 사통팔달의 요충지였다. 삼남대로를 따라 칠원3동 ‘쇠물뿌리’로 내려가는 길 외에도, 동삭동 ‘모산골’과 ‘번개들(평택순복음교회 주변)’을 지나는 길, ‘소장자골’로 내려가는 칠괴동길, 현대아파트와 당재를 넘어 ‘서재’로 내려가는 길도 있었다. 또 송탄초등학교를 갈 때는 쌍용자동차 기숙사 옆을 지나 도일천을 넘어 다녔으며, 삼남대로 따라 ‘서낭고개’와 원도일을 지나면 ‘여방면(여좌울)’으로 갈 수 있었다.
칠원1동에는 주막이 두 집이 있었다. 하나는 송탄동과 삼남대로가 갈라지는 옥수정 옆에 붙어있었고, 다른 하나는 길 건너 마을빌딩 앞 고구마 밭에 있었다. 옥수정 옆의 주막은 김진O 씨 부친이 운영하였다. 주막은 봉놋방과 마방을 갖춘 형태로 술과 밥·잠자리가 제공되었다. 이홍O 씨 부친이 운영했던 마을빌딩 쪽의 주막은 초가삼간이었다. 이곳 주막은 봉놋방이 없었고 평상을 놓고 밥과 술만 팔았다. 한국전쟁 뒤에는 아랫거리 쪽에 간이주막도 생겼다. 일제강점기에 생기기시작한 간이주막은 선술집과 같아서 전통적 주막과는 거리가 멀었다. 해방 후 갈원주막의 이용객은 마을주민들과 이웃마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겨울이 되면 주막 봉놋방에 노름판을 벌이기 일쑤였고, 술을 마시고 고래고래 술주정을 하는 통에 가족들의 애를 태우기도 하였다. 때론 노름판에 끼어들었다가 추수한 곡식을 모두 잃고 장리쌀까지 얻어 갚아야 했던 에피소드도 주막 봉놋방이 만들어냈다.
교통의 중심에 있다 보니 변란이 발생했을 때는 본의 아니게 큰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예컨대 이인좌의 난(1728) 때 반란군에 호응하다가 고초를 겪었던 일이며, 1946년 9월에 있었던 ‘가재리농민폭동’의 중심역할을 한 덕택에 한동안 따가운 눈총을 받았던 것이 그것이다. 
수 백 년 동안 삼남대로의 애환을 지켜봤던 갈원주막은 한국전쟁 뒤 문을 닫았다. 옥수정 옆 마방집은 전쟁 직전 불이 나서 없어졌고, 이홍O 씨 부친이 운영했던 주막은 주인이 늙고 병들면서 문을 닫았다. 겨울철이면 주막 봉놋방을 달구었던 주민들도, 사회주의적 이상을 실현하겠다며 봉기했던 젊은 혁명가도 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모두 잊혀졌다. 다만 임금도 마시고 장사치들도 마셨던 ‘옥수정玉水井’만이 지난 세월을 이야기 할 뿐이다.

 

▲ 인조 임금이 마신 옥관자정 정비 후 고사 모습(1970년대)

 

글·사진/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다큐사진/박성복 평택시사신문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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