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9월 15일

송탄면 장당리 광천진흥리에 설립
무산아동 위해, 남녀 학생 합 16명

 
“경기도 진위군 송탄면 장당리(振威郡 松炭面 獐堂里) 광천진흥회에서는 그 동리 무산아동의 교육기관이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지난달 15일부터 야학부를 설치하고 저녁마다 열심히 교수 중이었는데, 벌써 생도 수는 남녀 합 16명에 달한다고 한다.”(동아일보 1933년 10월 15일)

지금은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교육환경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와  1930년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일단 일본제국주의는 ‘충량한 신민’을 양성시키는 것이 식민교육의 목적이었다. 그렇다 보니 식민기관에서 주도하는 공립교육은 조선인보다는 일본인으로 성장시키고자 했다. 또한 교육기관도 제대로 없어 교육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이와 같은 식민지 교육상황에서 많은 애국지사나 유지들은 적지 않은 사립학교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생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교육기관을 설립한 주체는 대부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재력가나 청년단체 그리고 종교단체·사회단체 등이 있었다. 평택의 진위청년회는 진청학원을 설립해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는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이외에도 평택의 각지에 야학 등 다양한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민족교육을 전개했다. 1933년 9월 15일 당시 진위군 송탄면 장당리에도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지금은 장당리(현 장당동)에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현대적 도시로 변했지만 1920~30년대에는 빈한한 한촌(閑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를 위한 교육기관이 제대로 운영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933년 9월 15일 광천진흥회에서 야학부를 설치했다. 광천진흥회(光川振興會)가 언제 조직되고 누가 주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1920년대 조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대 들어 각지 특히 농촌마을마다 진흥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들 진흥회는 대부분 ‘시세의 진운’ 즉 당시 시대적 흐름에 따라 상호친목·풍속개량·지덕수양·산업장려 등 지방개량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때문에 대부분 지역 유지들을 중심으로 진흥회를 조직했다. 장당리 광천진흥회도 이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광천진흥회는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무산아동을 위해 야학부를 설치하고 저녁마다 농사일을 마친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불과 20여 일만에 학생 수가 16명으로 늘어날 정도로 호응을 받았다. 광천진흥회의 야학부가 언제까지 운영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당시 식민지 상황에서도 우리 민족이 교육열을 잘 알 수 있는 사례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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