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10월 28일

진위군청 주최, 평택연무장에서
1등 30원, 2등 20원, 3등 10원

 
“京畿道 振威郡廳에서는 去月 二十八日 午前 十時부터 平澤演武場에서 道路品評會 施賞式을 擧行하였는데, 會長 崔益夏(本郡守) 氏의 式辭로 비롯하여 審査長 工藤良三(道技師) 氏의 報告가 有한 後 來賓諸氏의 祝辭와 受賞者 代表의 答辭로 左와 如히 受賞하였다고. 一等 一點 三十圓, 二等 一點 二十圓, 三等 十點 十圓式, 四等 二十九點 褒賞狀” (동아일보 1924년 11월 4일)

도로의 역사는 우리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다. 사람이 ‘걸어 다니던 길’이 도로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기원전 5세기경 이용되었던 ‘페르시아 왕도’, 실크로드의 5대 지선으로 북유럽에서 호박과 주석을 수송하는 데 이용됐던 ‘호박로(琥珀路)’ 등은 아주 오래된 도로 가운데 하나다. 우리나라도 도로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고려시대부터 역도(驛道)가 조성되었고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발전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제가 주요 도시 가로망을 정비하면서 격자형 도로망을 만들며 신시가지를 조성하기도 했다.
품평회는 물건이나 작품 따위를 모아 놓고 그 품질을 평가해 대중에게 보이는 대회다. 우리나라 최초의 품평회는 1910년 11월 1일부터 7일간 경북 상주에서 개최한 농산물품평회다. 이후 품평회는 다양한 방면에서 실시되었는데 도로분야에도 적용됐다. 도로품평회는 ‘도로의 견고성과 선명 광활’을 평가했다. 평택에서도 1924년 10월에 도로품평회를 개최했다. 보통 1개월 동안 진행되는 도로품평회는 마을 주민 전체가 참여했다. 당시 시상 상금이 적지 않았는데 1등은 30원, 2등은 20원, 3등은 10원을 각각 포상했다.
한편 도로품평회에서는 진위군수 최익하(崔益夏)가 축사를 했다. 최익하는 1888년 인천 출생으로 관립일본어학교를 졸업했다. 통역관으로 활동하던 그는 일제강점 이후 인천부 서기, 경기도 서기를 거쳐 포천군·진위군·안성군·고양군의 군수를 역임했다. 진위군수는 1923년 3월부터 1930년 3월까지 7년간 재직했다. 안성군수로 갈 때 북일루(北一縷)에서 전별식을 갖기도 했다. 1930년대 평북 참여관, 조선유도연합회 이사 등 친일활동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특히 최익하는 1940년 창씨개명 당시 평안북도 참여관으로 재직했는데 앞장서서 ‘화산(和山)’으로 창씨를 한 바 있다. 시상식을 한 평택연무장은 평택경찰서에서 거금 50원을 들여 건축하고 1923년 11월 3일 낙성식을 가진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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