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곶포는 바닷물이 역류하는 최상류의 포구로
평택~화성 양감으로 가는 수로교통의 중심이며
동청포는 청북사람들이 수원·한양을 가는 길목이었다

 

 
▲ 서탄면 황구지리 옛 항곶진 부근

수 백 년 나루와 함께 살아온
황구지리는 큰 변화를 겪었다.
나루터에 다리가 놓이고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면서
고깃배가 들어오지 않았고
미군기지 확장으로 폐동되어
두릉3리로 집단 이주를 했다.
동청포의 가장 큰 변화라면
1957년 콘크리트 교량이 건설되고
진위천 제방이 높게 쌓이면서
수해에서 해방된 것이다.
근래에는 한산·어연산업단지와
여러 곳의 산업단지가 건설되면서
다리의 폭이 더욱 넓어졌다.

▲ 황구지리 옆을 흐르는 황구지천
▲ 황구지 석교가 있던 곳

4 - 화성과 청북을 연결했던 항곶진과 동청포

평택은 물의 고장이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40여 개나 되는 하천이 평택평야를 가로질러 아산만으로 흘렀다. 바다와 하천은 수로, 해로교통의 수단이었고, 갯벌은 수산자원의 보고였으며, 나루와 포구는 교통과 포구상업의 중심이었다. <평택시사신문>은 앞으로 10회에 걸쳐 평택지역의 길 ‘나루·포구, 그 위의 삶’을 연재한다. 물과 함께 살아온 평택사람들의 삶을 함께 여행해보자.
- 편집자 주 -

▲ 미군기지 확장사업으로 폐동이 된 황구지리
▲ 서탄면황구지리와 양감면을 이어주는 황구지교

■ 진위천 윗머리 항곶포項串浦

조선시대는 나루를 포浦·진津·도渡로 구분하였다. 포浦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하천 어귀의 나루이며, 진津은 강가에 위치하여 사람도 건너 주고 포구상업도 이뤄졌던 나루였고, 도渡는 단순히 강을 건너 주는 나루만을 의미했다. 도渡 가운데는 서울 송파나루의 삼전도가 유명하며, 진津으로는 한강의 노량진·동작진·양화진, 포浦는 인천의 소래포구·금강유역의 강경포구·영산강 하구의 영산포가 유명하다.

바다가 가깝고 하천이 발달한 평택지역에는 수많은 나루와 포구가 있었다. 내륙 깊숙이 바닷물이 밀려들어 포구와 나루가 혼재된 것도 평택지역의 특징이다. 대표적인 포구로는 아산만 유역의 대진·경양포·신흥포·계두진·옹포를 꼽을 수 있으며, 내륙 안쪽에는 군물포·이포·동청포·항곶포·다라고비진이 있었다.

항곶포는 바닷물이 역류하는 최상류의 포구다. 다른 이름으로는 항곶진·황구포라고 불렀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아산만·남양만에서 밀려들던 바닷물은 안성천·진위천·발안천 수로를 따라 항곶포와 서탄면 회화리까지 올라갔다. 이곳은 좌동 숯고개에서 갈라져 사거리, 금각리를 거쳐 온 육로교통의 한 갈래와 신장동 구장터와 K-55오산공군기지 안에 있었던 장등리·신야리를 거쳐 온 다른 갈래 길이 만나는 요지였고, 평택에서 화성시 양감면으로 건너가는 수로교통의 중심이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수원도호부에서 내려오는 군대의 이동통로였다.

항곶포 일대가 교통의 요지이고 하천부지가 넓다 보니 일찍부터 간척과 포구상업이 활발했다. 교통과 상업의 발달로 나루터에는 둑너머라는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낮은 구릉지대에는 황구지리가 만들어졌다. 황구지리 전 노인회장 황영승(2006년·76세)씨에 따르면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옹진군의 용유도나 아산만의 길음리·당거리 어부들이 강다리·숭어 같은 생선과 새우젓·어리굴젓·민어포를 배에다 싣고 들어와 곡물과 물물교환을 했다고 말했다.

어염魚鹽의 물물교환은 외상거래가 많았다. 어부들은 보리이삭이 팰 때나 늦가을 김장철에 우선 생선이나 젓갈을 퍼주고는 초여름이나 가을 추수 때 쌀로 받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항곶포를 가장 많이 이용한 사람들은 화성시 양감면 사람들이었다. 양감 사람들은 초등학교도 서탄면 금각초등학교를 다녔고, 시장은 중앙시장이나 서정리장, 심지어 해방 전후에는 야학이나 강습소까지 항곶포로 건너다녔다. 아쉬운 쪽이 양감사람이다 보니 나룻배도 양감사람, 뱃사공도 양감사람이 운영했다.

항곶포를 가장 많이 이용했던 것은 초등학교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평소에는 나룻배나 징검다리를 이용하여 건너다녔지만 장마가 져서 물이 불어나면 학교에 갈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그럴 때면 아이들과 선생님들은 냇가로 달려 나가 소리쳤다. ‘선생님 학교 못가요’, ‘그래, 학교 오지 마’.

 

▲ 고덕면에서 상공에서 바라 본 청북면 동청포
▲ 동청포를 향해 흐르는 진위천(백봉리)

■ 청북면 가려면 동청포 건너야

동청포는 고덕면 동청리에 있었던 포구다. 조선후기 청북면 사람들은 동청포를 건너야 수원이나 한양을 갈 수 있었고 근대 이후에는 서정리역이나 서정리장을 볼 수 있었다. 밀물이 올라오면 진위천 수로를 따라 조운선과 상선들도 드나들었다. <고려사>에 보면 1217년(고려 고종4) 진위현의 영동정 이장대·직장동정 이당필·별장동정 김예가 거란의 침입에 대처하지 못하는 최 씨 무신정권에 대항하여 진위민란을 일으킨 다음 종덕창과 하양창을 점령하여 곡식을 군졸들에게 풀어 먹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종덕창의 위치도 동청포로 추정된다.

동청포의 위치는 본래 동청2리 원동청이었다.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동청2리는 남서쪽으로 진위천이 휘돌아 흘렀고 남동쪽으로는 두릉천이 흘러 배들이 접안하기에 좋았다. 나루터는 두릉2리 계루지 마을 사이의 ‘뱃터’라 곳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청포의 전성기시절 뱃터에는 옹진군의 용유도·덕적도에서 밀물을 따라 올라온 중선中船이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 궁안교(소청다리) 건설로 큰 배가 드나들 수 없게 되면서 작은 평저선이나 전마선들이 들어왔다.

상선과 나룻배가 닿고 상거래가 활발하면서 마을 옆에는 장시場市도 열렸다. 장시場市는 일제시기에 계루지벌과 구동안들이 간척되면서 없어졌지만 아직도 ‘장터거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어 옛 모습을 알려준다. 동청포는 일제강점기 간척 계루지벌과 구동안들이 간척되고 나루터가 메워지면서 동청1리 동연교 아래로 옮겨졌다. 동연교 아래 뱃터에는 주막도 두 세집 있었고 청북면으로 건너가는 나루터도 있었다. 나룻배는 항곶포처럼 청북면 어소리 사람들이 운영하였다.

 

▲ 동청포 옆에 형성된 동청2리 원동청마을

■ 녹록치 않았던 삶, 그래서 지금이 좋아

냇가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다. 나루터가 가져다주는 이점도 컸지만 만성적인 수해를 숙명처럼 껴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 냇가의 삶이었다. 박OO(88세) 씨, 전OO(87세) 씨는 동청2리 주민이다. 두 사람은 포승읍 서두물이라는 마을과 머물이라는 마을에서 동청리로 시집왔다. 박 씨는 해방 직후까지만 해도 동청리는 매년 수해가 났었다고 말했다. 수해가 나면 경작지가 침수되고 집안까지 물이 차올라 지대가 높은 동청1리로 대피하였다. 주민 김기순(74세) 씨도 신혼 때 물이 불어나는지도 모르고 밥을 먹다가 가슴까지 차오르는 바람에 급히 아이를 들쳐 업은 뒤 새끼줄을 잡고서야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해방 전후 진위천에는 동청교(동청이다리)가 놓였다. 초기 동청이다리는 목교木橋였다. 수해가 심할 때면 동청이다리도 떠내려갔다. 다리가 떠내려가면 청북사람들은 다시 나룻배를 타야만 했다. 한산리 수부가 친정인 김기순 씨도 어릴적 서정리장을 갈 때 나룻배를 탔던 기억이 있었다. 포승읍 원정리가 친정인 박 씨는 60리가 넘는 친정을 궁안교까지 걸어가서 넘어 다녔다고 말했다.

동청교에서 서정리까지는 10리였다. 동청리 사람들은 두릉2리 계루지와 아홉거리를 지나 서정리장을 오갔다. 옛날에는 30리가 넘는 평택장도 걸어 다녔다. 평택장은 서정리장보다 컸고 우시장이 있어서 진귀한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평택장에 한 번 다녀오는 것이 소원이었다. 어릴 때 율포리에서 동청리로 이사와 혼인하고 지금껏 살아온 김종여(71세) 씨는 아버지가 소 팔러 평택장을 갈 때 따라갔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김기순 씨도 송아지를 팔러 우시장에 따라갔다가 해장국을 사먹었던 기억을 갖고 있었다.

전 씨 할머니는 젊어서부터 장사를 했다. 빈농인데다 농사만 지어서는 아이들 키우며 먹고 살기 힘들어 시작한 일이다. 전 씨는 마을에서 쌀이나 채소와 같은 농산물을 사다가 서정리장이나 송탄 중앙시장에 팔았다. 30~40년 전에는 쌀 서너 말씩을 머리에 이고 시장에 내다 팔면 한 말에 500원을 남겼다. 동청리 마을에는 전 씨 말고도 쌀장수를 한 사람이 여러 명이다. 콩이나 채소 같은 농작물을 팔러 다녔던 사람도 많다. 쌀장사·채소장사는 버스가 다니면서 조금 수월해졌다. 하지만 짐이 많다면서 잘 태워주지 않아서 서러움도 많이 겪었다.

어르신들과 인터뷰하다가 박 씨 할머니에게서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시적 머물마을에 살 때 포승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일제 말 민족말살정책으로 일본어만 배워서 정작 한글은 잘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참 웃기고도 서글픈 현대사에 방안에 있던 사람들과 한참을 웃었다.   

수 백 년 나루와 함께 살아온 황구지리는 해방 후 큰 변화를 겪었다. 1971년 큰 물난리로 나루터 마을이었던 둑너머가 폐동되어 황구지리와 통합된 것, 나루터에 다리가 놓이고 1974년에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면서 고깃배·새우젓배가 더 이상 들어오지 않게 된 것, 근래 미군기지 확장으로 황구지리마을이 폐동되어 두릉3리로 집단 이주한 것이 그것이다.

황구지리만큼은 아니지만 동청포도 변화를 겪었다. 가장 큰 변화라면 1957년 동청포 자리에 콘크리트 교량이 건설되고 진위천 제방이 높게 쌓이면서 수해에서 해방된 것이다. 근래에는 청북지역에 어연·한산공단을 비롯한 여러 곳의 지방산업단지가 건설되면서 다리의 폭이 더욱 넓어졌다. 조만간 고덕국제신도시 건설공사가 완성되면 번화한 시가지를 곁에 둔 생경한 마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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