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3월 3일


경제적으로 평택이 더 유리해
면협의회에서 만장일치 가결

 

“진위군청(振威郡廳) 소재지는 병남면 평택리(丙南面 平澤里)인 바, 병남은 거금 十八년 전(丙寅) 행정구역 개편할 때 병파 성남(丙坡 城南)의 양개 면을 합하여 병남면이라 칭한 것이요 별로이 고적이나 지리상의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며, 평택역이 있는 관계로 일반 사회에서 평택은 알아도 병남은 알지 못하는 고로 상업 거래와 기타 제반 관계상 불편이 적지 아니 하고 각종 관공서 학교 은행 회사 상점 등에 다 평택의 명칭을 부치었고, 다만 면명만 그대로 있음으로 금월 三일 면협의회에서 병남면을 평택면으로 개칭함이 편의하다고 일치 가결되어 의견서를 당국에 제출한 바, 일반 면민은 속히 개칭되기를 기대한다” (동아일보, 1931년 3월 13일자)

오늘날 ‘평택’이라고 불리는 평택지역의 지명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진위군과 평택군의 통합이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복선들이 많이 나타난다. 우선 진위군 일대는 신분할국·아슬현·부산현·부성현·금산·송달활달·연달부곡·송장부곡·용성현·광덕현·차홀현·영신현 등으로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불렸다. 평택군 일대는 하팔현·팽성현 등으로 불렸다. 조선시대까지 진위지역과 평택지역으로 각각 나뉘었다가 1914년 4월 1일 면단위까지의 행정구역 개편과 통폐합으로 오늘날 평택이 자리 잡게 됐다.

그렇지만 평택이라는 지명이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오래된 ‘진위’보다 ‘평택’이 회자되면서 굳어지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1905년 개통된 경부선의 ‘평택’이라는 역명 덕분이었다. 평택군이라는 지명이 있었지만 평택군 내에 평택이라는 지명은 없었다. 평택면·평택리 등등. 경부선의 평택역이 설치되면서 평택은 쌀의 집산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평택역을 중심으로 일본인거주지역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도심지가 생겨나게 되었다. 더욱 가장 중요한 점은 군청·학교·은행 등 공공기관이 들어서면서 평택역 일대는 진위군의 중심이 됐다. 이후 진위보다는 평택이라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931년 3월 3일 당시 진위군 병남면협의회는 평택면으로 면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병남면은 병파면과 성남면이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병파면의 ‘병’과 성남면의 ‘남’을 따서 병남면이라고 했다. 당시 행정구역 통폐합되면서 이와 같이 지명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후 한동안 잘 불렸던 병남면이 수난을 겪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고적이나 지리상으로 연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평택역으로 인해 병남이라는 지명보다는 평택이 더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해 관공서와 학교 등 공공기관·금융기관·상가 등이 형성되면서 경제적으로 평택이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일부가 아니라 병남면민 대부분이 함께 공유했다. 결국 1931년 3월 3일 면협의회에서 만장일치로 병남면에서 평택면으로 변경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평택면은 평택읍으로 승격, 진위군이 평택군으로 개칭되면서 오늘날 평택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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