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없는 서러움 


오늘 30년 만에 정렬이가
새처럼 하늘을 날며 그린
집 그림을 찾고 보니
천하의 보물을 얻은 듯
기쁜 마음이 한량 없습니다.
8살 때 지도로 ‘우리 집’을 그린
바보 정렬아, 사랑한다

 

 
봄이 되어 서울 아파트촌에 가면 겨우내 입던 옷을 빨기가 싫어 헌옷 수거함 통에 버린 옷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옷이 중국으로도 가고 아프리카로도 가고… 남미로도 가고…

세계 곳곳 전해져 옷을 사 입지 못해 헐벗은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귀한 선물이 되고 있으니 한 편으로는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300년 전이나 130년 전도 아닌 불과 30년 전만 해도 우리도 헐벗고 굶주린 나라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집’은커녕 우리 뱃속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며 살아야 했고 고등교육을 받고 멀쩡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거의 모두가 다 남의 집 문간방이나 월세방을 살아야 했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서러움이 배곯는 서러움이라고 하지만 남의 집 대문 곁 문간방에 사는 일 또한 배고픈 서러움 못지않은 괴로움이었지요. 셋방살이 하는 집 아이는 주인집 아들보다 힘이 세도 안 되고 공부를 잘 해도 안 되고 아침 점심 저녁 삼시 세끼 셋방 사는 사람은 주인집 보다 더 맛있는 반찬을 해먹어도 안 됐습니다.

혹 콧구멍만한 문간방 부엌에서 고기냄새라도 나는 날에는 ‘저렇게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사니까 돈을 못 모으고 고작 남의 집 셋방이나 살지’하면서 빈정댔습니다. 또 주인집은 무엇이든 만들어 나누어 먹지 않아도 어느 누가 뭐랄 사람이 없었지만 셋방 사는 사람들은 특별한 음식을 만들면 꼭 주인집에다가 ‘진상’을 해야했지요.

만에 하나 그러지 않는 날에는 당장 방을 빌려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인간이 돼야 했습니다. 그것도 공짜로 사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셋방살이 집세는 해마다 올려주어야 했습니다. 그것도 집세를 올리는 일에 무슨 규칙이나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주인 마음대로였습니다. 그러니 그 집에 그나마 붙어살려면 평소에 이것저것 챙겨주며 집주인 비위를 거스르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집주인은 툭하면 결혼·초상에 친정집 회갑잔치까지 들먹이며 안 그래도 돈이 없어 남의 집 셋방 사는 서러움에 물질적 부담까지 얹어주었지요.

대저 문간방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건축허가를 받아서 지은 건물이 아니라 집주인이 방세를 받으려고 제멋대로 달아지은 건물이니 따로 수도계량기나 전기계량기가 달려 있을 턱이 없어 매달 어김없이 돌아오는 월말이면 주인집과 수도세나 전기세를 나누느라 적잖이 실랑이를 벌어야 했지만 항상 승자는 집주인이었습니다. 집주인은 제 방정식대로 엉터리 계산을 해서는 기어코 셋방 사는 사람들에게 덤터기를 씌웠습니다. 그 때마다 셋방 사는 서러움이 쌓여갔습니다.

어쩌다가 아이들이 싸우다 셋방 사는 아이가 주인집 아이한테 한 대 맞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 셋방 사는 아이는 제 엄마에게 위로를 받는 것은 고사하고 셋방 서러움을 제 아이에게 분풀이를 하려는 엄마에게 주인집 아이한테 맞은 것에 10배 20배는 더 두들겨 맞아야 했습니다.

지금부터 32년 전 당시 막 8살이 된 지금은 미국 LA에서 살고 있는 둘째 녀석 정렬이가 그린 우리 집 그림입니다.

어려서부터도 다른 아이들 하고는 잘 어울리지 못해 바지춤에다 막대기를 칼처럼 꽂고 늘 혼자 놀기를 좋아하던 정렬이는 충혼산이 제 놀이터요, 친구였습니다. 그리고 가끔씩 어쩌다가 자기 친구라며 집에 데리고 오는 아이들을 보면 하나같이 누렁 코를 달고 다니는 착해빠진 아이들이나 온 얼굴에 때가 꾀죄죄한 굴 구석에서 나온 것 같은 아이들뿐이었지요.

학교에 가서도 정렬이는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해 수업이 끝나고 노는 시간이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앞에 나가 칠판을 지우는 일로 쉬는 시간을 때우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점심시간에는 운동장에 나가서 놀기보다는 옥상에 올라가 저 혼자 뛰어놀다가 내려오곤 했지요.

사회성이 부족하고 누구에게 상처받기를 싫어했던 정렬이,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받아온 성적표에 행동발달상항이 전부 가나다에서 ‘다’만 받은 바보. 그래서 학교에서 하는 짓이 정말 바보에 말썽꾸러기인가 해서 학교엘 찾아갔더니 1, 2학년 때 연거푸 정렬이 담임을 했던 선생님이 그 말을 듣고는 민망스러웠던지 ‘에이 담임선생님한테 봉투를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하는 말을 들었던 정렬이가 1983년 학교에 들어가기 전 방에 엎드려 시험지에다 그린 ‘우리 집’ 그림.

아이들에게 집을 그리라고 하면 지붕도 있고 담도 있고 대문도 있는 집을 그리고 집 뒤에는 나무도 몇 그루 그럴 듯하니 그렸지만 ‘못난’ 정렬이는 하늘에서 내려다 본 우리 집을 그렸습니다. 충혼산도 그리고 충혼산에서 내려오는 계단도 그리고 골목길도 그리고 우리 집 뒤 연립주택도 그렸습니다.

어느 날 문득 정렬이가 새처럼 하늘을 날며 그린 우리 집 그림이 생각날 때면 그 그림은 진작 잃어버렸겠지 해서는 혼자 애를 태우며 안타까워했는데 오늘 30년 동안 그린 그림을 모아둔 파일 속에서 정렬이가 그린 집 그림을 찾고 보니 천하의 보물을 얻은 듯 기쁜 마음이 한량없습니다. 그 날 정렬이 그림을 보고 놀란 마음에 날짜까지 써둔 것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1983년 1월 14일. 바보 ‘온달’이 평강공주에게 장가들었듯 바보 정렬이를 어여삐 여겨 하늘은 정렬이에게 평강공주보다 더 예쁜 색시를 보내주셨습니다.

8살 때 지도로 ‘우리 집’을 그린 바보 이정렬. 정렬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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