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볼을 더욱 다양한 연령층이 즐길 수 있도록 저변 활성화를 이뤄내고 싶습니다” 안정적인 삶을 이뤄내다심영범(78세) 평택시게이트볼협회장은 평택과는 멀리 떨어진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해방둥이’로 태어났다.열여섯에 아버지를 여읜 심영범 회장은 열아홉의 어린 나이에 일자리를 찾아 홀로 상경했다.“고향에 있어봤자 먹고 살길을 찾을 수가 없어 친구 외삼촌이 서울 영등포에서 운영한 도금공장에 들어갔어요. 그 당시 공장 기숙사에 살면서 월급으로 200원을 받았죠”적은 임금에도 부지런히 돈을 모아 가정을 이룬 그는 1980년 서울 마장동에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공동체의 가치를 지켜나가고 싶습니다” 교육 가치관의 형성정기수(51세) 들레생활공동체 대표는 인천 서구 검암동 해주 정씨 집성촌에서 나고 자랐다.일가친척이 모여 살며 왕래가 잦았기에 공동체는 그에게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생활 환경이자 문화였다.4남매 중 둘째인 정기수 대표는 활발했던 성격 탓에 마을에서는 이집 저집 곳곳을 누비는 개구쟁이였지만, 학교에서는 임원을 도맡을 정도로 씩씩하고 당찬 학생이었다.“중·고등학교 모두 집과 멀리 떨어진 곳에 다니면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도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싶습니다” 일찍이 독립하다칠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윤증순(67세) 평택경찰서 진위파출소 생활안전협의회장은 형제 중에서도 유난히 튀는, 활발한 성격을 가진 소녀였다.멋 내기를 좋아하는 꿈 많은 소녀였던 윤증순 회장은 형편상 남동생을 위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지만, 일찍이 취업해 돈을 벌며 야간학교에 진학했다.“중학교 졸업 직후 공장에서 미싱을 시작했습니다. 야간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가며 자격증을 따고 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죠”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마산을
“평택항이 사람과 물류, 관광과 레저가 공존하는 항만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평택항의 존재를 깨닫다최성일(59세) 평택당진항발전협의회장의 고향은 평택 팽성읍 안정리 길마재마을이다.당시 팽성읍은 공립 중학교가 없을 정도로 낙후한 농촌이었고, 그는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외가 식구들이 거주하는 인천으로 떠나야 했다.“부모님은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저를 인천으로 보내셨어요. 시골 촌놈이 대도시에 가서 적응하려니 힘든 점이 굉장히 많았죠”도시 아이들은 논밭이 아닌 운동장에서 축구화를 신고 뛰어놀았고, 이미 선행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고 싶습니다” 학업에 대한 열정김학정(57세) 오케이농장 대표는 5대째 대를 이어 평택시 팽성읍 원정리에 살고 있다.현재 원정리는 주한미군 타운하우스 등 각종 주택이 들어섰지만, 과거에는 논과 밭, 과수원이 드넓게 펼쳐진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그는 어린 시절부터 마음 한쪽에 성공에 대한 의지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아버지는 어린 시절 사고로 손을 다쳐 장애가 있으셨습니다. 당시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이 남아있었는데, 알게 모르게 아버지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꼭 성
“평택지역의 생태계를 보전하는 데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동아리에서의 경험김영철(53세) 한국조류보호협회 평택시지회장은 자연 생태계와는 비교적 거리가 먼 대도시, 서울 출신이다.그는 고교 시절 ‘야생조수탐조회’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처음 자연 생태계에 관심을 갖게 됐다.“학교에 처음 생긴 동아리가 야생조수탐조회였습니다. 탐조하기에는 장비가 부족해 나비 채집을 주로 했죠. 그래도 표본과 도감을 만드는 일이 굉장히 재밌었어요”동아리 활동을 통한 경험이 진로와 연결되지는 않았다. 김영철 지회장은 대학 진학에 실패한 뒤 인천에 있는 한 직업
“평택이 문화 불모지가 아닌 문화를 선도하는 지역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미술을 전공하다최승일(55세) mM아트센터 관장은 평택과 맞닿은 경기도 오산에서 성장했다.오산중앙시장에서 기름집과 방앗간을 운영한 부모님은 생업으로 바쁜 와중에도 장남인 그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셨다.“과거에는 장남의 의미가 컸잖아요. 그래서 유독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죠. 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최승일 관장은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대한 관심이 컸다. 첫 특별활동 때도 미술부를 선택했고, 방과 후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도 그
“수어문학으로 농인의 언어, 문화, 정체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한국 유학길에 오르다농인聾人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는 ‘수어민들레’가 2023년 8월 15일 평택시 고덕동에 사무실을 얻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이곳의 운영을 총괄하는 손청(42세) 수어민들레 운영팀장은 대표를 맡은 남편과 함께 농인을 위한 자원봉사 활동과 수익 사업을 모색하고 있다.“저는 중국 랴오닝성 안산시에서 왔어요. 지난 2006년 국제수어통역을 배우기 위해 한국 유학길에 올랐고,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뤘죠”손청 팀장은 어린 시절 열병을 앓
“진위면 주민으로서 지역 발전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진위면 봉남1리 토박이강장규(62세) 진위면주민자치회 부회장은 군 복무 시절을 제외하고 고향 진위면 봉남리를 떠난 적이 없는 토박이다.“군대 생활 30개월 정도만 빼고는 쭉 제가 태어나고 자란 봉남1리에서 생활했어요. 진위면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도로만 조금 더 확장했을 뿐이지, 노선은 거의 그대로이죠”어린 시절부터 활발했던 그는 중고교 시절 선후배들과 함께 4-H회 활동에 열중하기도 했다.“아버지가 지역 어르신 한 분과 함께 땅을 기부해 평택군농촌지도소 진
“목회를 통해 행복을 전하고 싶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다박종승(65세) 평택호스피스 대표는 어머니의 신앙을 이어받은 모태신앙인이다.교회 권사로 활동했던 어머니는 쉰 살의 늦은 나이에 그를 낳았고, 정성으로 키우셨다.“제 고향은 충북 청주 오송역 인근의 밀양 박씨 집성촌이었어요. 저희집은 종갓집이었죠. 저는 늦둥이인 데다 장손이었기에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부모님과 누님의 정성 어린 보살핌 아래 잘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집에서 200m 거리에 있던 교회는 박종승 목사에게 놀이터이자 일상의 공간이었다.그는 이러한 환경에서 자연스
“평택시립노인요양원을 전문성을 갖춘 차별화된 노인요양원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사회복지를 시작하다이강희(63세) 평택시립노인요양원장은 평택과 인접한 천안 신당동에서 성장했다.어린 시절 유복한 환경에도 말썽 한번 피우지 않는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는 대학 진학 후 변화했다.“좀 더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양한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친구를 많이 만들었죠”건축공학을 전공한 이강희 원장은 졸업 후 번듯한 대기업 건설사에 입사했다.“당시 롯데월드 건설 현장에서 3년간 현장기사로 근무했습니다. 한데 업무가 적성과
“평택시 체육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무너진 체육인의 꿈박종근(61세) 평택시체육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체격 조건과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각종 스포츠에 두각을 보였다.“친구들 사이에서 주로 골목대장을 맡았어요.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고향 홍천을 떠나 인천으로 이주했는데, 도시에서도 운동으로 밀리지 않았죠”박종근 회장은 인천 제물포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엘리트 체육을 시작했다.“학교 교기가 유도여서 매주 한 시간씩 유도를 배워야 했습니다. 저는 육상부였는데, 이때 코치님의 제안을 받아 유도부로 전향했죠”주장을
“불심으로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승려가 되다자비사 주지 보문 스님(60세)은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우연히 연이 닿게 된 정오 스님을 따라 이천 영월암에 기거하면서 스님들의 보살핌 아래 성장했다.“어린 시절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외가댁에서 지내다가 정오 스님을 따라오게 됐는데, 어린 나이에도 절이 참 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스님이 염불을 외면 옆에서 덩실덩실 춤을 췄죠”그는 정오 스님이 입적한 뒤 화성시 용주사에서 성장했다.당시 용주사에는 10여 명의 학생이 머물렀는데, 교사 출신인 용주사 주지 정무 스님의 자상하고 세심한
“신장쇼핑몰 상권을 살리기 위해 계속해서 봉사할 계획입니다” 이불가게를 열다평택시 서정리 신창동 신흥교회 인근에서 태어나 열네 살 무렵 신장동에 정착한 하영희(72세) 송탄상공인회장은 그야말로 송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신창동은 황해도 피난민이 대거 정착했던 곳으로, 그의 부모님도 이북에서 내려와 이곳에 터전을 잡았다.하영희 회장은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탓에 한눈팔 틈도 없이 부모님의 가르침을 따라야만 했다고 회상했다.“대학 진학은 안 된다는 아버지 말씀을 듣고 효명고등학교 전자과에 진학했습니다. 자립하기 위해서는 기술이
“토종꿀의 대중화와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양봉, 대를 잇다현예은(30세) 벌이랑꿀이랑 대표는 양봉장을 운영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전국 곳곳을 누빌 수 있었다.“아버지는 1973년 19세가 되던 해에 이동양봉을 시작하셨다고 해요. 꽃이 피는 시기가 되면 더 많은 꿀을 얻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죠. 서울부터 제주도까지 방방곡곡을 누볐습니다”어린 나이에 잦은 전학은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데 어려움이 됐고, 이를 우려한 부모님은 결국 평택시 안중읍에 정착했다.현예은 대표는 학창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농업에 별다른 관심
“평생평소로컬푸드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노력할 계획입니다” 평택에 정착하다유광호(64세) 평생평소로컬푸드 대표는 1979년 스무 살에 평택시 오성면 길음리에 정착했다.“고향은 경기도 과천인데, 집과 논밭이 모두 서울대공원 부지에 강제 수용되면서 부모님과 함께 평택으로 이주했어요. 처음 왔을 당시 길음리는 버스도 하루에 몇 대 없고, 대부분 비포장도로인 데다 굉장히 삭막했죠”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고 자랐지만, 본인이 농사를 업으로 삼을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부모님은 쌀농사를 지으셨는데, 논이 넓지 않아 수익이
“평택농악 발전을 위해 서로 양보하고 화합해야 합니다” 우여곡절의 유년기김용래(84세) 평택농악 보유자는 천안군 화성읍 쌍용동 299번지에서 삼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네 살 무렵 아버지를 여읜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일찍이 힘겨운 삶을 마주해야 했다.“아버지는 사금 채취장에서 일하다가 돌아가셨어요. 이 사실도 생전 아버지와 알고 지냈던 이돌천 아저씨에게 전해 들었죠”강릉김씨 한 계파의 6대 종손으로, 전주이씨 집안과 마을의 중심을 이뤘던 그의 집안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했다.“원래 집터도 넓고 작은 논도
“교통사고 없는 안전사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장녀로서의 책임감김정숙(57세) 평택경찰서 송탄모범운전자회장은 2남 2녀 중 둘째, 장녀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를 대신해 어린 시절부터 살림을 도맡았다.“아버지는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일찍 세상을 떠나셨어요. 이때부터 어머니는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하셨고, 저는 그런 어머니를 대신해 형제들의 도시락을 챙겨야 했죠”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천성이 긍정적이고 밝았던 그는 ‘친구를 많이 사귀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항상 원만한 교우관계를 유
“바나나 하면 떠오르는 자체 브랜드를 만들고 싶습니다” 진로를 고민하다정동욱(43세) 청휴원 대표는 집안 대대로 살아온 평택시 오성면 일대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그의 아버지는 제대로 된 농기계도 없이 드넓은 논밭을 일궈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제가 아주 어렸을 적에는 길음리에 전화도 연결되지 않았었다고 해요. 부모님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농사를 짓고 저와 누나를 키우셨죠”정동욱 대표는 초등학생 시절 가족과 함께 교포리에 정착했고, 아버지는 그가 중학교에 입학한 뒤 한우를 키우기 시작했다.“당시 한우를 키우면 받을 수 있는
“지속해서 시민사회 활동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학생운동에 투신하다박호림(50세) 평택시공익활동지원센터 팀장은 과거 드넓은 배 밭이 펼쳐진 용이동 일대에서 성장했다.“아버지는 계속 일간지를 구독하셨습니다. 그 영향으로 저도 신문을 많이 읽었어요. 또 독서를 중요하게 생각하셨는데, 아버지를 따라 동대문까지 가서 중고서적을 사 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운동권으로 활동한 네 살 위 큰형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진보적 학풍의 한신대학교에 진학해 신학을 전공했다.“중고교 시절 몰래 형의 책을 읽기도 했고, 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