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3월 6일30대 과부, 20대 청년 불륜 아기연못에 버려, 지나던 사람이 발견 “지나간 륙일에 진위군 오성면 양교리(振威郡 梧城面 梁橋里)의 조그마한 연못 속에 간난아해의 사체가 있는 것을 어떤 사람이 발견하고 보고하였으므로, 소할 평택경찰서에서는 즉시 사범주임 현장을 급행하여 안중리(安仲里) 주재소원들과 협력하여 범인을 수색한 결과 (중략) 간
1943년 3월 22일유기·철품 1천여 점, 해군 무관부 납부당시 표현 ‘불같이 타오르는 적성’ 협력 “격멸의 결의 더욱 굳은 전 반도는 지금 바야흐로 금속헌납의 적성에 불타고 있어 二十二 일에도 ‘트럭’ 네 대의 금속을 멀리 평택(平澤)으로부터 경성 해군 무관부에 헌납되었다. 평택군에서는 그간 금속회수에 진력하여 오던 바, 국민의 적성은 불길 같이 타올라
1945년 1월 17일전시체제기, 9개 실천사항 부의농산물 공출·국방 헌납 등 강조 “평택군연맹에서는 지난 十七일 오후 一시 동군 회의실에서 기네마스 군수 사회로 역원상회의를 개최하고 좌기 실천 철저사항을 부의하였다.一. 암행위를 단호 조격합시다. 二. 절제저축에 매진합시다. 三. 근로동원에 대한 오해를 一소하여 혼연 적극적으로 참가 출동합시다. 四. 각종
1921년 3월 7일연혁·폐고읍·군세 등 평택 역사 소개인구 6만 4000여 명, 일본인 729명 “(가) 沿革: 本郡은 高句麗 時에 釜山縣이라 稱하고, 新羅 景德王 時에 振威라 稱하여 水城郡(水原郡)의 領縣이었으며, 高麗朝를 經하여 李朝 太祖 時에 忠淸道로부터 割하여 本道에 移屬케 한 後 振威郡이 되고 大正 三年 郡廢合 時에 忠淸南道 平澤邑 外 水原郡 龍
1921년 3월 29일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 위해 파견한 달 후 ‘평택독립단사건’ 발생 “지나간 이십구일 평택 장날(平澤市日)을 당하여 평택경찰서 방순사가 시중을 순행하던 중 수상한 자 한 명이 빙빙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그 순사가 뒤를 쫓아다녀도 그절저절을 모르는 그 자는 각호를 기웃기웃 들여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는 거동이 수상함으로 유무를 물론하고 잡아
1936년 1월 7일남부럽지 않게 살던 자동차 운전수재혼한 부인, 두 남매 버리고 도망 “본적을 영등포에 둔 류춘록(柳春録, 46)은 십오년 전부터 자동차 운전수(自動車運轉手)가 되어 십팔년 전에 충남 직산(稷山) 사는 장인흥(張仁興, 36)과 결혼을 하여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여오던 중 십년이 되던 해
1939년 4월 24일일곱 번째 총회에서 임원진 선거회장 이민훤, 부회장 신순호·정우범 “평택곡물협회 제칠회 정기총회는 지난 이십사일 오후 한시에 동 회관에서 개최하였는데, 회장으로부터 개회사가 끝난 다음 결산보고가 있었고, 역원을 투표 선거하였는데, 회장 이민훤(會長 李敏煊) 씨는 재임되었고 역원 전부는 아래와 같이 선거하였다고 한다(하략)”(조선일보,
1937년 7월 1일유지와 행정 뛰어난 인물 임명수진농조사건 연류, 빈민 구제도 “평택군 서탄면장 임승국(林承國) 씨와 오성면장 김대경(金大經) 씨는 다년간 면 행정에 많은 공로를 남기고 그 후임으로 서탄면장으로는 홍건표(洪建杓) 씨가 임명되고, 오성면장으로는 그 면에 二十여 년간 근무하여 일반에 신임과 명망이 두터운 정흥섭(鄭興燮)씨가 임명되었더라”(매일
1940년 2월 26일 3~6학년 400여 명 근로반 조직도로에 자갈 깔아, 애국열 미화“평택군 평택읍(平澤郡 平澤邑內) 진청학원(振靑學院)에서는 지난 二十六 일 삼학년 이상으로부터 육학년까지 四백여 명의 근로반은 도로를 펴는 자갈을 깔아 통행하던 사람에게 안전보행을 도모한다는데, 시국하 애국열이 넘치는 선생님과 생도들에 총후근로보국의 열정을 일반은 칭송이
1933년 4월 8일 경제대공황, 서춘 조사부장 초청‘美 금본위 정지 따른 영향’ 주제“본보 평택지국(平澤支局) 주최로 당지 평택공보교 강당에서 지난 八일 오후 八시에 지국장 안종수(安宗洙) 씨의 사회로 본사 서춘(徐椿) 씨의 미국금정지와 그 영향(米國金停止와 그 影響)이라는 경제강연회를 개최하였는 바 一백七十여 명의 청중으로 성황리에서 마치고 동 十一시
1929년 12월 1일 주인 없는 집 들어가 금품 강탈용의자 세 명 검거 후 엄중 조사“振威郡 丙南面 柳川里 安城橋 工中場 土木監督 韓聖九(三九)의 집에는 一日 午後 열시경에 나이 三十五六歲 가량 되어 보이는 男子 한 명이 目出帽를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고 『지가다비』를 신고 대문을 들어와서 주인 聖九가 없음을 기회로 聖九의 妻 姜振年(三一)을 몽둥이로 때
1920년 12월 4일 평택 안성천 다리에서 죽이고 투신남편 동정론 따라 감형 징역 3년“지난 이십오일 오전 십시 경성지방법원 형사법정에서 살인 급 사체유기한 중죄인에 대하여 동정 있는 열변을 토하여 ‘범한 죄는 면키 어려운즉 최대 감형을 하여 징역 삼년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고가 있었는데, (중략) 마침 작년 십이월 사일에 무단히 집을 떠나 경기도
1921년 4월 29일 황로태·이종국 등 조선독립단 조직독립군자금 모집문서 발송 해 검거 “평택경찰서 관내 각처에 지난번 내로 독립자금을 강청하는 불온문서를 우편으로 보내는 자가 있음을 탐지하고, 평택경찰서에서는 그 서신의 소인(消印)이 경성 광화문 우편국 소인임을 알고 이래 비밀 속에 활동 중이더니, 마침내 고심으로 수색한 결과 (중략) 황로태 이종국의
1917년 5월 29일 일본인 요리집 주인, 조선인 폭행이를 말리던 조선인 순사보도 폭행 “지나간 이십구일 밤 십일시경에 경부선 평택역전(京釜線 平澤驛前) 요리 영업하는 옥천(玉川)의 집에 대풍파가 났다는데 그 자세한 내용을 들은 즉, 해점 주인 옥천이가 요리 먹으러온 조선 손님과 무슨 관계로 왈시왈비 하다가 그 부근에 있는 내지인 목수 삼사인을 초집하여
1919년 5월 14일 운수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위해진위경찰서 주도, 임금 일정하게“當地에는 從來 勞動賃金이 一定치 못하고 又는 無理太高하여 一般 運輸의 必要가 有한 人은 困難이 莫甚터니, 今般 振威警察署에서는 勞動組合 組織의 必要를 鑑하고, 此에 勞力한 結果 去 十四日에 正式으로 完全한 平澤勞動組合이 組織되었다는데, 其 趣旨는 賃金을 一定히 하며 同組合員
1915년 4월 2일 기차 무임승차로 남대문정거장까지취조 받고 공짜로 평택으로 돌아와“서대문경찰분서에서 이일 아침때에 어떤 한 시골사람 한 명을 세워놓고 경관의 취조가 있는데, 어떻게 웃은 지 옆에 서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허리를 펴지 못하게 하였더라.(하략)”(매일신보, 1915년 4월 3일)우리나라에 기차가 도입된 것은 경인선이 개통되면서부터이다. 1
1917년 4월 16일 신 교사 건축으로 400여 원 부채 안아경성 제일류 기생과 가객 초빙해 7일간“기보와 같이 평택 유지자 모모의 발기로 원 사립학교 동명의숙(東明義塾) 채무를 환상하기 위하여 기생연주회를 개최하는데, 본월 십육일부터 이십이일까지 흥행할 예정이며, 장소는 약 일천 평의 공지를 이용하여 임시극장을 건설하고 경성 제일류의 기생 이십명과 명창
1915년 6월 20일 북면 동원리, 1000여 명 동원 사냥경북에서 어린이 20~30명 물어 죽여“경기도 평택경찰서 관내 진위군 북면 동원리(京畿道 平澤警察署 管內 振威郡 北面 東原里) 근처에 본월 칠일과 십오일 두 차례에 늑대가 출몰하는데, 이는 작년에 경상북도에서 어린 아이 이삼십명을 물어 죽인 것과 같은 늑대가. 근처의 인민은 이를 두려워하여 농사
1923년 1월 16일 진위군 장○○, 정선 금광에서 절도조선은행에 1700여원에 팔려다 발각“경기도 진위군 서면 송화리 이백구십삼번지 장○○(京畿道 振威郡 西面 松花里 張○○)은 일전에 평택(平澤) 경찰서의 손에 체포되어 절도죄로 취조를 받던 중인데, 장만진은 지난 십일월 팔일 오전 여덟시 경에 강원도 정선군 동면 화암리 최응렬(江原道 旌善郡 東面 化岩里
1921년 10월 1일 삼천리사, 적합 인물 공천 요청1032표 중 112표, 안재홍 공천“朝鮮日報 東亞日報 社長公薦 結果發表今春 본사에서 조선 사회의 중요기관인 朝鮮日報 及 東亞日報 社長의 공천을 널리 半島人士에게 요청하였던 바, 규정대로 모집 기일까지 전부 1,032표의 多數한 투표가 海內 海外로부터 있었사 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