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시사신문·평택문화원 공동기획] 경기도당굿은 정월과 10월마을의 안녕을 기원,풍농과 풍어를 위해마을사람 모두 참여해 경기도당굿, 지방굿 가운데 마을굿 형식을 띠며 세습무가 진행세습무가 연주 기량을 발휘하고, 독창적 사설을 주도해서 부름화랭이는 타악은 물론 삼현육각 선율악기와 조화 이루는 형식 Ⅲ. 평택의 예인藝人2.
[평택시사신문·평택문화원 공동기획] 중중모리 장단의 상여소리이승과 작별하며 부르는달구꾼들의 회닫이소리‘박용철’ 명인 가는 길에 되받다 박용철,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8호 평택민요 장례요 보유자 활약20세를 갓 넘긴 나이부터 ‘요령잽이’로 인근 마을에 널리 알려져장례요를 담아 음반 제작
[평택시사신문·평택문화원 공동기획] 어업이 주업인 갯가에서 나서어려서부터 고기잡이를 하며자연스럽게 갯가소리를 배웠고마을 상쇠로 농악대 이끈 ‘이종구’ 이종구,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8호 평택민요 어업요 보유자로 활약마두마을 어른들과 중선배를 타고 서해바다에 나가 고기잡이 시작어업요를 담아
[평택시사신문·평택문화원 공동기획] 고사소리를 아침에 받아저녁이면 다 외워 불렀을 정도로기억력과 소리에 능했던평택의 참 소리꾼 ‘이민조’ 이민조,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8호 평택민요 농요 보유자로 활약평택 서부권 농요 발굴, MBC라디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녹음1980년 ‘경기농악’ 단원으로 제21회 전국민속예술경연
[평택시사신문·평택문화원 공동기획] 논·밭이 많이 분포한동북부·중부지역은 농요,바닷가에 접한 서남부지역은어업요가 발달한 ‘평택의 민요’ 논일·밭일이나 땔감을 할 때, 고기잡이를 할 때 부르는 ‘노동요’망자의 저승길을 축원하며 부르는 상여소리·회다지소리의 ‘장례요’마을신인 당목과 우물·장독·부엌에서 하는 고사소리 ‘세시의
[평택시사신문·평택문화원 공동기획] 선천적 타고난 성음으로광대의 네 가지 요건인‘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를모두 다 갖춘 명창 ‘이동백’ 고종에게 당상관堂上官 벼슬인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제수 받아1908년 9월 ‘적벽가’ ‘심청가’ 녹음, 최초의 판소리 음반으로 기록1939년 이후 10년간 평택 칠원동 거주
[평택시사신문·평택문화원 공동기획] 천하를 주름잡던 명창들도 ‘적벽가’라면그의 앞에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는대단한 명창이 바로 ‘모흥갑’ 모흥갑, 경기 진위와 죽산 등 출생설 있지만 진위 태생으로 알려져임금이 소리꾼을 총애해 벼슬을 하사한 어전명창은 모흥갑이 최초송흥록, 안성판 ‘춘향가’에서 당대 ‘적벽가’ 최고 명
[평택시사신문·평택문화원 공동기획] 국보급 예인藝人을수없이 배출했던전통예인의 고장 ‘평택平澤’ 농사와 어업, 풍년·풍어·무사안녕 등 기원과 기복의 무속음악 발달모흥갑·이동백 등 당대 최고의 소리꾼, 평택에서 나고 만년 보내지영희·방용현, 경기시나위 안산제와 동령제 율제篥制 만들어내 Ⅰ 기획특집 연재를 시작하
인간은 길 위에서 태어나길 위에서 살다가 길 위에서 죽는다사람에게 길은 삶이고 소통이며‘인생’으로 비유된다 전통적으로 평택은 길의 도시다.평택지역에는 조선시대 10대로 뿐 아니라중로·소로·수로·해로가거미줄처럼 연결돼 있었다.근대교통은 전통의 도로망에철도와 신작로를 선물했다.여기에 30여 년 전에는 항만이 생겨났고조만간 고속철도까지 보태진다고 한다.평택사람들
시장을 평택동으로 옮기려고 계획했던 것은새시장 일대가 대부분 논과 밭이었고철도역과 시외버스터미널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새시장 조성은 평택읍에서 주도했다.평택읍사무소는 논밭을 메워7평, 10평짜리 상가건물을 짓고는일반에게 분양했다.분양가는 7평짜리 상가건물의 경우평당 10만원이었고지가地價는 별도였다.당시 새시장 상가는인기리에 분양됐다.시장이 옮겨오면 부동산 가
안정리가 크게 변모된 것은 일제 말이다일제 말 팽성읍 안정리와 함정리 일대에일본 해군의 보급창고와 비행장이 건설됐다 기지촌이 형성되면서 일곱집매 일대에는상가들이 들어섰고주변의 산등성이와 논밭에는판자촌이 형성됐다.기지촌 주민들은미군기지에 근무하는 사람과기지촌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장사하는상인들로 분류됐다.미군기지 근무자들은기지 정문과 가까운 안정1리나송화2,
재빼기 구 상권이 축소되는 과정에서도동쪽 신장터 점포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시장을 옮기면서 상점이 300여 개에 육박하고 있다 구 안중장터였던재빼기 골목은 한산하다.서평택지역 다섯 개 읍·면 뿐 아니라아산만 건너 충청도 내포사람들과발안천 건너 화성사람들까지모여들었던 안중장 골목도한산하기는 마찬가지다.광신액자에 모여든안중 토박이들은이제 재빼기 골목의 주인은중
안중읍은 서평택지역의 중심이다안중장의 뿌리인 직산장은 19세기 후반학현리와 화양리의 경계지점인 재빼기로 이전했다 초기 안중장은 안중리 덕성식당 앞골목을 중심으로 형성됐다.이 골목은 ‘재빼기’라는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긴 능선으로 이뤄져 있다.나중에는 덕성식당 골목에서안중고등학교 구 정문을 지나는골목도 번화했다.이 골목은 포승읍 만호리 대진에서안중장으로 들어오
한 때 기지촌에 가장 많았던 가게는양복점과 옷가게, 화랑을 들 수 있다양복의 구매고객은 주로 미군들이었다 미군들은 외출할 때 사복을 입었고장교들은 크고 작은 파티도 많았다.흑인들은 클럽에 갈 때도 양복을 입었다.기지촌 양복점은 수제로 제작할 뿐 아니라미국의 수제양복 1벌이면대 여섯 벌을 맞출 만큼 값이 쌌다.그래서 귀국하는 미군들 중에는 선물용양복을 열 벌
기지촌은 분단과 외국군 주둔이 낳은 도시다미군은 전쟁 막바지 분단고착화의 기미가 보이자한반도 곳곳에 미군기지를 건설했다K-55 오산AB는 주둔 초기 만해도적봉리에 정문을 두었고곳곳에 소통문을 설치했다.기지촌은 적봉리 정문 초입의‘사거리’에 먼저 발달했다.그러다가 정문이 신장1동 제역동일명 지골 부근으로 옮겨가면서신장쇼핑몰 일대가 번화하기 시작했다.미군 기지
일제강점기 시가지의 중심은 ‘서정리역전골목’이었다역전골목 좌우와 국도 1호선 건너편에는공공·종교·의료기관, 식당과 단체가 자리 잡았다 서정리장은 1910년 전후 개장했다.서정리역전에 장시場市가 형성되기 전에는진위읍내장이나 신장동의 새장터,안중장과 수원장, 소사장이가장 가까운 장시場市였다.서정리장은 전형적 오일장으로 시작했다.개시일은 2일과 7일이었는데가까운
통복시장의 3대 상권은 싸전·우시장그리고 포목전(피륙전)이었다미곡상·포목상·소장수쯤 돼야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1980년대만 해도 장날 포목전은기성복이나 한복을 사려는 사람들로발 디딜 틈이 없었고평일에도 바느질감이 밀려서제 때 물건을 만들어주지못할 때가 많았다.주단골목은 2000년 전후급격히 쇠락했다.젊은 소비자들의 취향 변화와인터넷 쇼핑몰이나 한복대여점
예로부터 평택장은 싸전과 쇠전이 가장 컸다싸전의 주인공은 미곡상들이다근대이후 평택장은 미곡의 집산지이며 중계지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통복시장 싸전거리에는미곡상점이 100여 개가 넘었다.여기에 장날이면노점들과 주변 농민들까지 뒤섞여북새통을 이뤘다.눈치 빠른 ‘거간居間’들의 술수,‘말감고-監考’들의 현란한 손재주도싸전의 볼거리였다.서울의 도매상인들은이른 새
통복시장의 기원은 평택장이다평택장은 1905년 1월에 개통된경부철도 평택역 주변에 발달한 장시다 평택지역의 장시는 진위면 봉남리나팽성읍 객사리 같은 행정의 중심지,경양포나 옹포·동청포와 같은 포구주변삼남대로나 충청수영로와 같이육로교통의 요지에 나타났다.진위면 봉남리 진위읍내장팽성읍 객사리 평택읍내장, 안중읍에 안중장포구주변에 발달했던 청북면의 신포장고덕면
평택동의 번화가를 ‘명동골목’이라고부르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60년대부터다.새 시가지는 부챗살 도로망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철도역에서 동북으로 500미터 지점의경찰서와 평택군청, 읍사무소,북쪽의 통복시장과 세무서그 사이를 지나는 국도 1호선과 38호선은중심가로를 형성했다.일제강점기 삼거리라고 불렀던 곳이나중에 시장로터리로 명명된 것도한국전쟁 뒤의 일이다.명